국립중앙박물관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전, 통역관·기자·서예가 활약… 애국지사 오세창 조명
국립중앙박물관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전, 통역관·기자·서예가 활약… 애국지사 오세창 조명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3.11.06 14:37
  • 호수 8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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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통역관, 기자, 서예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창 오세창을 조명한다. 사진은 오세창이 서예가로서 역량을 보여준 ‘옛 기물의 명문을 임모한 병풍’.
이번 전시에서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통역관, 기자, 서예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창 오세창을 조명한다. 사진은 오세창이 서예가로서 역량을 보여준 ‘옛 기물의 명문을 임모한 병풍’.

16세 때 대이어 조선 역관으로 활동… ‘한성순보’ 기자 거쳐 ‘만세보’ 창간

김정희의 ‘손자’ 진품 감정 등 서화 연구… ‘위창체’ 개발 등 문예활동도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1879년 16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관이 된 남자가 있다. 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하기도 했다. 1902년 천도교에 귀의한 그는 천도교의 기관지인 ‘만세보’를 창간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통문화 유산을 보는 안목도 남달랐는데,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그 유명한 간송 전형필이다. 또 서예가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둥그스름한 형태의 본인만의 서체를 창안하기도 했다. 다재다능한 삶을 살았던 이 인물은, 올해 서거 70주년을 맞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이다.

통역관, 기자, 서예가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애국지사 오세창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2월 25일까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진행되는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전에서는 56점의 유물을 통해 그의 생애와 예술 활동을 조명한다.

오세창은 오래된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씨인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고 연구한 부친 오경석에 이어 서예, 회화, 금석문 등 여러 분야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석문 탑본을 오려 붙여 두 첩으로 편집해 엮은 ‘근역석묵’을 소개한다. 상첩에는 삼국~고려의 탑본 40개, 하첩에는 조선시대 탑본 38개가 수록돼 있다. 이 첩은 18~19세기에 편찬된 금석문 탑본첩과 제작 방식이 유사해, 오세창이 금석문 연구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첩에는 469년 고구려가 평양 성벽을 축조하면서 새긴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탑본이 수록돼 있다. 평양성 석편은 1855년 오경석이 수집해 오세창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후 일부 소실됐지만 ‘근역석묵’의 탑본은 결실(缺失) 전 모습으로 가치가 높다.  

근역석묵 속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탑본
근역석묵 속 ‘고구려 평양성 석편’ 탑본.

또한 오세창은 옛것을 연구하며 감식안을 길러 서화를 품평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서체가 매우 독특해 진위 논란이 있었던 김정희(1786~1856)가 쓴 ‘손자’가 진품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는 먼저 ‘손자’에 찍힌 인장이 김정희 제자 신헌(1810~1884)의 것임을 밝혔다. 신헌은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됐을 때 서신을 주고받을 만큼 각별한 사이로, 김정희가 무인인 신헌을 위해 전략과 전술의 기본서인 ‘손자’를 손수 적어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은 김정희가 당나라 서체를 참고했다는 점을 들어 ‘손자’를 김정희의 진품으로 결론내렸다. 또한 13세기 고려불화 ‘수대장존자’의 기원과 내력을 ‘고려사’·‘해주부지’ 등의 기록을 참고해 작성했는데, 그림 뒷면에 기원과 내력을 쓴 글이 부착돼 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서는 위창체라고 알려진 자신만의 서체를 개발하며 큰 족적을 남긴 서예가로서의 오세창도 소개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종정와전명임모도’(鐘鼎瓦塼銘臨摸圖)이다. 고대 중국의 기와와 청동기 명문 25점을 따라써(임모) 병풍으로 제작한 것으로 제1폭 상단 진나라 와당 ‘여천무극’(與天無極)부터 제10폭 하단 청동기 명문까지 장수와 다복 등 긍정적인 내용의 문구로 이뤄져 있다. 그는 명문마다 예서나 행서로 뜻과 유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고 직접 새긴 인장을 찍었다. 옛 문자에 대한 오세창의 관심과 이를 활용한 예술적 감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옛 글씨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상형고문’(象形古文)과 ‘전서’(篆書) 작품을 제작했다. 상형고문을 쓴 ‘어·거·주’(魚‧車‧舟)는 문자를 보는 순간 그림이 연상되는 작품으로 옛 글씨의 문자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대 문자의 상형문자적 특성을 살렸다.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전서로 쓴 우리나라 문인의 시’에는 ‘바다 동쪽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란 뜻에 ‘영동관란도인’(瀛東觀瀾道人)이라는 호가 적혀 있다. 의미상 오세창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본에 망명했던 때(1902~1906)에 사용한 호로 추정되며, 이 작품에서 중년 시절 필치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오세창은 문예인들과 ‘맹원’(孟園)이라는 곳에 모여 글을 짓는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도영, 고희동 등 서화가 16인과 함께 신벽시사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전시에서는 ‘맹안아집’과 ‘산벽시사모임을 기념해 함께 제작한 그림’ 등을 통해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역량을 키운 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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