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5] ‘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을 찾아서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5] ‘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을 찾아서
  • 조준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승인 2023.11.13 10:10
  • 호수 8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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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리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을 찾아서

오래된 길에 사람 자취 사라져 울긋불긋 이끼가 끼었는데,

산이 속세를 떠난 게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구나!

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

고경무인자선반, 산비리속속리산.

-황준량(黃俊良), 『금계집(錦溪集)』 권2 「2일 유신(維新 충주(忠州))에 도착하여 속리산을 

유람하는 김중원(金弘度의 字)에게 부치다[二日 到維新 寄金重遠遊俗離山]」


어느새 바람도 제법 쌀쌀해지고 일교차도 커졌다. 곱게 물든 단풍을 즐기러 산행(山行)에 나설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단풍 명소의 하나로 속리산(俗離山)을 꼽는데, 이 산에 관한 명구로 ‘山非離俗俗離山’이 자주 회자(膾炙)된다.

인터넷을 훑어보니 이 구절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작품이라고 한다. 더 찾아보면 그가 886년(헌강왕12) 속리산에 와서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이 속세를 떠난 게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구나!]’이라는 시구를 지어 산 이름이 ‘속리산’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막상 최치원의 전기(傳記)를 수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고운집(孤雲集)』을 검색해 보면, 그가 이 구절을 지었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만년에 산천을 떠돌며 은거 생활을 하던 최치원이 어쩌면 속리산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최치원 창작설은 일단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은 누가 지었을까?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임제(林悌, 1549~1587)가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을 800번 읽고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라는 시구를 얻었으니, 『중용』의 말을 응용한 것이다. 林悌入俗離山, 讀《中庸》八百遍, 得句曰: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用《中庸》語也.(《芝峯類說》 卷14 〈文章部7 詩藝〉)(중략)

훗날 영남(嶺南)의 선비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 1725~1789)이 1776년 고향 친구인 이헌유(李憲儒, 1733~1804)에게 보낸 시에서도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이라는 구절이 보인다.(중략)

그런데 이보다 앞서 ‘山非離俗俗離山’을 쓴 사람이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인데, 그의 문집인 『금계집(錦溪集)』에 따르면 1557년(명종12) 3월 2일에 지었다고 한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556년 겨울에 황준량은 병으로 사직한 뒤 이곳저곳을 유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그와 교분이 있던 김홍도(金弘度, 1524~1557)가 마침 속리산을 유람하고 있었다. 이때 황준량이 그에게 지어 보낸 시의 맨 앞에 ‘古徑無人紫蘚斑, 山非離俗俗離山.’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현재로서는 ‘山非離俗俗離山’이 가장 먼저 쓰인 사례로 보인다.(하략)

조준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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