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변했으니 우리도 변해야지”
“세월이 변했으니 우리도 변해야지”
  • 이미정 기자
  • 승인 2009.09.18 13:59
  • 호수 1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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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 풍속 급변…어르신들 “자식들 눈치 보기 싫어 수용”
 며느리 배려해 인터넷 제수 주문·가족 여행지서 차례 지내기도
“노인이 나서 원칙 지키며 전통문화 계승해야” 반론 만만찮아

명절 풍속도가 변하면서 추석을 맞는 어르신들의 감회가 남다르다. 명절 연휴 해외 또는 국내 여행을 떠나는 것은 물론 인터넷으로 제사 음식을 주문해 상에 올리는 모습은 다반사다. 차례를 지내지 않거나 간소화하는 경우도 흔하다. 벌초 대행업체가 반짝 특수를 올리는 것도 크게 변한 모습. 어르신들도 변모하는 명절 풍속도에 맞춰 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명절 연휴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원했지만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예식이 간소화되면서 이 같은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추세다. 특히 자녀들에게 대접 받기보다는 오히려 배려하려는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김연희(67·여)씨는 이번 추석 연휴에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명절에 떠나는 두 번째 여행이다. 첫 여행은 지난해 추석 때 손자 돌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내외의 권유로 이뤄졌다.

처음엔 명절을 집이 아닌 외부에서 보낸다는 자체가 께름칙했지만 오랜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펜션에서 공동으로 차례를 지내는 모습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씨는 “예전에는 추석 명절을 집밖에서 지내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라며 “하지만 세상이 많이 달라졌고, 현실을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조금씩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녀와 따로 사는 김종태(79·서울 도봉구) 어르신은 자녀들이 명절 때 찾아오면 절대 자고 가라고 권하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평소 왕래가 잦은 이유도 있지만 자녀들이 하룻밤이라도 묵고 갈 경우 아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 어르신은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은 좋지만 자고갈 일이 생기면 이부자리나 음식 등 더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이 생긴다”며 “굳이 서로 불편함을 참아가면서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큰아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정수권(84·경기 일산) 어르신은 명절 때가 되면 아들집에 갔다가 차례만 지내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온다. 오래 머물면 아들과 며느리가 불편해 할까봐 아침만 먹고 약속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뜬다. 아들과 며느리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정 어르신은 “예전에는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고 받들어야 하는 일이 당연했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다”며 “나는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며느리 혹은 딸의 입장을 배려하는 어르신들도 적지 않다.
김태현(68·서울 구로구)씨는 몸도 약한 며느리가 맞벌이 하는 모습이 늘 안쓰럽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며느리 입장을 고려해 집안일을 되도록 시키지 않는다. “올 추석은 인터넷으로 음식을 주문해도 되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씨는 “맞벌이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엔 직접 음식을 만들어 차례를 지냈지만 요즘은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음식 만들기까지 강요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수원에 사는 송선미(68)씨는 지난 한가위 차례 상에 전통 음식대신 열대성 과일을 올린 적이 있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어차피 저희들이 먹을 건데 이왕이면 좋아하는 음식들로 올리는 게 어떻겠냐”는 며느리 뜻을 따랐다.

그는 “요즘 제사상에 피자도 올려 놓는다”는 손자의 말을 듣고 처음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변하는 명절 문화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만류하지 않았다.

한식이나 한가위 1년에 한 두 번 가족들이 모여 하던 벌초도 대행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김간난(78·충남 대천) 어르신은 얼마 전 아들에게 벌초 대행 서비스를 활용하라고 권했다. 아들이 지난해 선산 벌초를 하다 말벌에 쏘여 크게 고생한 기억이 충격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남들은 1년에 한 두 차례 하는 벌초를 직접 하지 않으면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위험부담까지 주면서 벌초를 하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풍속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어르신들도 상당수다. 한 어르신은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고 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며 “자식들의 사정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노인들이 먼저 원칙을 지키는 모습 보여 전통문화를 계승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미정 기자 mjle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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