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김구림’ 전…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김구림’ 전…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3.11.13 14:01
  • 호수 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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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창기 작품부터 비디오아트·설치·판화·회화 등 230여점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설치작품 ‘음과 양’ 연작 등 

이번 전시에서는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1974년 일본 국제판화비엔날레의 출품해 큰 화제를 모은 ‘걸레’. 사진=연합뉴스
이번 전시에서는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1974년 일본 국제판화비엔날레의 출품해 큰 화제를 모은 ‘걸레’. 사진=연합뉴스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1974년 개최된 제9회 일본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는 ‘판화’의 상식을 깨는 작품 하나가 출품된다. ‘걸레’라는 파격적인 제목으로 출품된 이 작품은 보자기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걸레 물이 번진 듯한 흔적을 찍어내고, 다시 그 위에 진짜 걸레를 올린 것이다. 대량 생산되는 일상용품에다가 판화 공정을 적용한 이 작품은 그랑프리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이 전위적인 작품을 통해 김구림(87)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현재까지도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국 실험미술의 대가인 김구림 작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1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7전시실에서 개최되는 ‘김구림’ 전에서는  비디오아트·설치·판화·퍼포먼스·회화 등 230여점의 작품과 60여점의 관련 자료를 통해 독보적인 길을 걸어온 그의 행보를 되돌아본다. 

경북 상주 출생인 김구림은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1959년 대구 공회당화랑에서 ‘김구림 유화개인전’을 개최하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섬유회사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며 영화‧연극‧무용 등에 관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를 비롯해 ‘공간구조 69’(1969),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매스미디어의 유물’(1970) 등 국내 최초로 ‘대지미술’(자연 경관 속에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 ‘일렉트릭 아트’, ‘메일아트’(우편을 통해 소규모 작품을 보내는 데 중점을 둔 예술 운동) 작품을 선보이며 전위예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범상치 않은 미술세계는 특히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2012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 이브 클라인, 쿠사마 야요이 등과 현대미술을 이끄는 세계적인 예술가 20인 명단에 김구림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이번 전시에서 6전시실은 작품 활동 초기에 해당하는 195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을 전개한 1970년대까지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1960년대 초반 비닐, 불, 천 등을 이용해 제작한 추상 회화, 한국 실험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1/24초의 의미’(1969) 등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머물며 제작한 설치작품 등을 소개한다. 

이중 눈여겨볼 작품은 1960년대 작업한 추상 작품이다. 김구림은 전쟁의 참상과 충격, 청춘기의 불안정성을 회고하며 ‘핵1-62’를 제작한다. 패널 위에 비닐을 바르고 불을 붙이면 타오르는데, 이때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고 남은 흔적으로 불안전성을 표현한 것이다. 

김구림의 1960년대 추상 작품은 크게 흑색조 또는 백색조 화면으로 나뉜다. ‘핵1-62’가 흑색조에 해당된다면, ‘질-62’는 대표적인 백색조 작품이다. 유화 물감과 문명의 산물인 ‘비닐’에 불을 불인 생경한 조합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화면 구성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향후 작품세계에서 드러나는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까지도 한국 실험영화의 시초로 회자되는 ‘1/24초의 의미’도 소개한다.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 구조에 기반해 제작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김구림이 직접 제작, 감독, 편집, 디자인을 맡았다.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고층빌딩, 육교, 옥외광고판, 방직공장 등 빠르게 변모하던 서울의 모습을 속도감 있게 담았다. 

또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의 하루는 하품과 흡연 등 일상적 행위로 채워져 있으며 그의 동작은 매우 느리게 표현된다. 영화는 1초 간격으로 바뀌는 무빙 이미지들을 조합해 통제 불가능한 현대 도시와 그 속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현대인들을 담고 있다.

7전시실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활동하며 제작한 작품들과 2000년대 귀국 이후 선보인 ‘음과 양’ 연작 등을 선보인다. 1989년 뉴욕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초청을 받아 LA로 작업실을 옮긴 김구림은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오브제(평범한 소재에 작가가 미술적으로 새로운 의미 부여한 매개체)를 도입해 재현의 방식을 달리하거나 상반된 개념을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문명에 대한 통찰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는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1991년 작 ‘음과 양 91-L 13’.
1991년 작 ‘음과 양 91-L 13’.

1991년 제작한 ‘음과 양 91-L 13’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개의 캔버스와 낚싯대, 물통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불타오르는 사실적인 고층빌딩 그림 옆에 나란히 위치한 주황색 캔버스는 화재의 긴박함을 더욱 고조시킨다. 오브제인 낚싯대와 양동이는 평면이 가진 불의 이미지와 반대로 물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물의 이미지가 건물을 집어삼킬 듯한 일촉즉발의 불의 이미지와 만나 서로 부딪히며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6전시실과 7전시실을 잇는 복도 공간에는 김구림의 다채로운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소개한다. 1970년 4월 11일 한강변 언덕의 잔디를 불로 태워 흔적을 남긴, 김구림이 최초로 실험했던 한국의 역사적 대지미술 프로젝트인 ‘현상에서 흔적으로’ 기록 사진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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