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1] 400년 전 베트남에 불었던 ‘한류 열풍’ “이수광의 시문에 붉은 점 찍으며 암송”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1] 400년 전 베트남에 불었던 ‘한류 열풍’ “이수광의 시문에 붉은 점 찍으며 암송”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1.20 14:05
  • 호수 8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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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서 학생까지 이수광의 시 애독… ‘절묘하네’  

베트남 첫 방문자 조완벽에 의해 이 사실 알려져

이수광(1563~1628)
이수광(1563~1628)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베트남에 한글 배우기 열풍이 뜨겁다. 베트남의 36개 대학에 한국어과가 개설됐고,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가 3년 만에 3배나 늘었다. 이는 오늘날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미 400년 전의 베트남에도 한류 붐이 일었다.

당시 안남(安南·베트남) 상류층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문장은 이수광(李睟光·1563~1628년)의 시였다. 이수광의 시에 붉은 묵으로 비점(批點)을 쳐놓고 암송할 정도였다. 

특히 그들이 감탄한 대목은 “山出異形饒象骨(산은 이상한 형상으로 솟았으니 코끼리뼈가 넉넉하고), 地蒸靈氣産龍香(땅에선 신령한 기운이 피어오르니 용향을 생산하네)”라는 시구였다. 

실제로 안남에 상산(象山)이 있는데, 안남 사람들은 “조선의 선비가 이를 어찌 알고 지었는가”라며 “정말 절묘하도다”라고 찬탄했다는 것이다.

이수광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이다.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 한켠에 조그만 초가를 짓고 살았다. ‘실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북경을 세 차례 다녀왔다. 백과사전식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남겼다.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처음 알리기도 했다.

북경 외국인 숙소에서 시로 화답

이수광의 시는 어떻게 베트남에 전래 됐을까. 조선과 베트남은 모두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각국의 사신들이 북경의 옥하관(외국인 숙소)에 머물며 서로 안면을 텄다. 159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나갔던 이수광도 이곳에서 베트남 사신인 70세 노학자 풍극관을 만났다. 두 사람은 50여 일을 숙소에서 머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서로 시로 화답했다.  

이수광이 “안남은 겨울도 봄처럼 따뜻하고 얼음과 눈을 볼 수가 없다고 하더이다”라고 운을 떼면 풍극관은 “남국은 겨울이 적고 봄이 하도 많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수광이 다시 “안남에는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누에가 있다고 하더이다”라고 말하자 풍극관은 “두 번 익는 보리와 여덟 번 치는 삼도 있소이다”라고 운을 짚어 맞받았다.

이수광은 풍극관의 인상과 풍모와 관련해 “겉모습이 매우 괴이했다. 이가 검고 넓은 소매의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조회 때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망건을 쓰고 복식을 갖춰 입고 입궐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귀찮다는 듯이 곧장 벗었다. 그는 늙었기는 하나 상당히 정력이 있어 독서를 쉬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풍극관은 이수광을 ‘대수필’(大手筆)이라고 추켜세우며 안남의 특산물을 선물로 줬다. 이수광은 답례로 조선의 붓과 묵을 주었다.  

풍극관은 귀국 후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86세까지 살았다. 그가 남긴 ‘풍공시집’에 수록된 시는 106수로, 이수광의 서문과 시가 수록돼 있다. 생전에 이수광과 헤어지는 걸 아쉬워해 이수광의 글을 받아놓았던 것이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이수광의 묘. 맨 위가 이수광, 다음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부인 윤씨의 묘이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이수광의 묘. 맨 위가 이수광, 다음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부인 윤씨의 묘이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수광의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수광 본인은 몰랐다. 이를 조선에 알린 이가 조완벽(趙完璧)이다. 조완벽의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진주 출신으로 154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돼 일본 사쓰마(가고시마)로 끌려갔다. 그곳서 종노릇을 하던 중 교토의 무역상에게 팔렸다. 그를 산 상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원자이자 거상(巨商)인 스미노쿠라 료이였다. 일본은 왜란 이전부터 동남아 일대에서 활발한 교역을 해왔다. 스미노쿠라는 비율빈(필리핀), 안남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해외 교역을 넓히기 위해 동아시아 공용어인 한자 실력이 높은 사람이 필요했다. 조완벽의 뛰어난 한문 실력이 그의 눈에 띄었고, 그의 무역거래를 돕기 위해 후레 왕조가 통치한 베트남을 세 차례 다녀오게 된 것이다.

조완벽은 1604년 처음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 당시 베트남의 통치 이념은 유교였고, 한자가 공식문자였다. 유교경전으로 공부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했다. 하노이에는 유럽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드나드는 국제시장이 있을 정도였다. 

베트남 여자 100세 넘어

조완벽 일행은 갈 때마다 3개월여 머물렀다. 3모작 농사와 100세 넘게 사는 여자들, 코끼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 등이 신기했다. 어느 날 베트남의 환관 정초가 고관들을 대접하는 자리에 조완벽 일행도 초대를 받았다. 정초는 조완벽이 조선 사람인 걸 알고 책 한 권을 내밀며 “조선의 이수광이 쓴 시”라고 소개했다. 

책에는 고금의 명시 수백 편이 실려 있었다. 그 중 이수광의 시가 첫 번째로 실렸다. 그리고 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이수광의 시를 암송한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조완벽은 1607년 7월, 포로송환 때 기회를 얻어 조선에 돌아왔다. 10년 만이다. 조완벽은 그간의 일을 얘기하면서 이수광의 시문 이야기도 꺼냈다. 그 자리에 있던 김윤안이 이 얘기를 듣고 이수광에게 전했다. 이수광은 매우 놀라며 ‘지봉유설’에 기록했다.

오늘날 베트남에 부는 한글배우기 열풍이 400년 전 조선시대에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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