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2] 조선의 119 소방대 ‘멸화군’ “물통·쇠갈고리·도끼 들고 화재 현장 출동~”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2] 조선의 119 소방대 ‘멸화군’ “물통·쇠갈고리·도끼 들고 화재 현장 출동~”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1.27 14:08
  • 호수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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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한양에 큰불로 민가 2170호, 상점 106칸 소실

50명으로 구성, 종루에서 화재 감시… 야간순찰 돌기도

소방대원들이 조선시대 궁중소방대의 완용펌프와 첨단 소방로봇을 이용해 화재진압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소방대원들이 조선시대 궁중소방대의 완용펌프와 첨단 소방로봇을 이용해 화재진압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에도 119 소방대가 있었다. 이른바 ‘멸화군’(滅火軍)이다. 명칭 그대로 ‘불을 끄는 관군’이란 의미다. 멸화군이 탄생한 배경은 한양에 크고 작은 불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426년 2월 15일 점심 무렵 한양 남쪽 인수부(仁壽府·군사를 맡아보던 관아)의 종 장룡의 집 부엌에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불은 삽시간에 번졌다. 마침 세종(조선 제4대 왕·1397~1450년)은 사냥을 떠나 한양에 없었다. 화재 진압의 총 책임을 중전이 맡았다. 중전은 “궁궐과 종묘만 지키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궁궐과 종묘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백성이 입은 피해는 참혹했다. 민가 2170호와 종로의 상점 106칸이 잿더미로 변했고, 남자 9명과 여자 23명이 불타 숨졌다. 

참고로 1428년 한성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양의 주택이 1만6921호, 인구가 10만3328명이다.  

사냥터에서 보고를 받은 세종은 서둘러 환궁했다. 화재수습이 다음날까지 이어졌지만 잔불로 인해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죄인들을 가두는 전옥서 근처 정연의 집에서 시작된 불이 주변 상점과 민가로 옮겨 붙었다. 불은 200호의 집을 태우는 것으로 끝났다. 그 와중에 도둑이 기승을 부려 화재로 인한 피해보다도 잃어버린 재산이 더 많았다. 

세종은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했다. 도로를 넓혀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할 수 있게 했고, 복잡한 시장의 상점에 방화용 담장을 쌓도록 지시했다. 관청과 궁궐 안에 우물을 파서 불이 나면 바로 물을 퍼 끌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현상금을 걸고 군대를 풀어 방화범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1467년 사옹원 화재 직후 설치

세종은 그해 2월 26일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화재 진압 전담부서였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큰불이 났다. 세조(조선 제7대 왕·1417~1468년)가 다스리던 1467년 사옹원(司饔院·임금 식사 및 대궐 안의 식사를 공급하는 일을 관장하는 부서)에서 난 불이 사옹원과 간경도감(刊經都監·불경의 번역 및 간행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의 건물, 창고를 불태웠고 민가에까지 피해를 주었다. 세조는 금화도감만으로는 역부족을 느껴 멸화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정원 50명의 멸화군은 도끼 20개, 쇠갈고리 15개, 동아줄 5개 등을 지급 받고 2층 높이의 종루에 올라가 하루종일 교대로 화재 감시를 했다.

화재를 발견하면 종을 쳐 경보를 냈다. 그리고 ‘멸화자’(물에 적신 천을 매단 장대)를 들고 현장에 출동했다. 멸화군 소속의 급수비자들은 물통을 들고 따라갔다. 현장에 도착하면 바로 깃발을 세워 지원군이 위치를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했다. 

진화 작업은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됐다. 하나는 불을 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지는 불을 막는 것이다. 물에 적신 보자기를 덮거나 급수비자들이 퍼온 물을 끼얹어 불길을 잡았다. 그리고 쇠갈고리, 도끼로 불이 난 집을 무너트려서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했다.

기와집의 경우 나무 기둥과 대들보가 불에 타면 지붕을 덮은 기와의 무게만으로도 집이 주저앉을 수 있다. 그 경우 인명피해가 날 수 있다. 멸화군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 갈고리로 기와를 걷어 내거나 도끼로 미리 부수기도 했다. 초가집은 짚더미를 치워 불길을 잡았다.

멸화군은 화재 예방 활동도 했다. 화재 진압 관원 신분증인 구화패(救火牌)를 들고 야간순찰을 돌았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순찰을 강화했다. 불조심에 대한 임금의 포고령도 집집마다 전달했다. 

◇경복궁 지붕에 쇠사슬 설치도

멸화군은 화재로부터 궁궐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화재가 날 경우 높은 지붕을 오르기가 힘들 것에 대비해 쇠사슬을 처마에 매달아놓아 그걸 붙잡고 지붕에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지붕 위에서 불을 끄다 미끄러질 경우에 대비해 지붕에 쇠사슬을 가로질러서 설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화재에 대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했지만 금화도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존속하다 1637년 인조가 ‘쓸모없는 관청’이라는 이유로 없애버렸다. 이후에 여러 차례 금화도감과 멸화군의 재설치 논의가 나왔지만 끝내 부활하지 않았다.

조선에 다시 소방대가 등장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이다. 이때는 서양의 화재 진압 장비를 모방한 ‘수총기’를 사용해 화재 진압을 했다. 수총기는 관상감 관원 허원이 청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것이다. 양쪽 손잡이를 눌러 물을 분사하는 일종의 수동펌프이다. 멸화군과 관련 창작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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