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3] 조선에도 고아원이 있었다 “세 칸짜리 한옥서 남녀 노비가 아이들 돌봐”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3] 조선에도 고아원이 있었다 “세 칸짜리 한옥서 남녀 노비가 아이들 돌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2.04 14:10
  • 호수 8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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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제생원 옆에 고아원 설립…입양 가능  

정조는 고아 구제 위한 9가지 법을 제정하기도

1928년 전주에 세워진 최초의 전주고아원.
1928년 전주에 세워진 최초의 전주고아원.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 초기에도 고아원이 있었다. “고작 10만여명이 모여 살던 한양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다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시대마다 그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정조가 고아 보호를 위한 9가지 법을 만들어 펴낸 ‘자휼전칙’.
정조가 고아 보호를 위한 9가지 법을 만들어 펴낸 ‘자휼전칙’.

정조(제22대 왕, 1776~1800)는 1783년 굶어죽는 아이들이 많아지자 이들을 구호하는 9가지 방법을 담은 ‘자휼전칙’(字恤典則)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자휼’은 어루만지며 구휼한다는 뜻이다.

자휼전칙은 흉년을 당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걸식하거나 버림받아 밥을 못 먹게 되자 아이들이 부모 및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구호하고, 자녀나 심부름꾼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양(收養·남의 자식을 키움)하도록 한 구휼법(救恤法)이다.

정조는 이를 국한문으로 인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반포해 영구히 시행하도록 했다. 9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호대상자인 ‘행걸아(行乞兒)’는 부모 및 친척이나 상전(上典)이 없어 의탁할 수 없는 4~10세까지의 어린이라고 규정했다. ‘유기아(遺棄兒)’는 3세 이하의 유아이다.

행걸아는 진휼청(賑恤廳)에서 구호해 옷을 주고 병을 고쳐주어야 하며, 날마다 1인당 정해진 분량의 쌀·간장·미역을 지급하게 했다. 유기아는 유모를 정해 젖을 먹이고, 유모나 거두어 기른 사람에게도 정해진 분량의 쌀·간장·미역을 지급했다. 

재밌는 사실은 행걸아나 유기아를 기르고자 원하는 자는 진휼청의 입안(立案)을 받아 자녀나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한 점이다. 

오늘날의 입양과는 조금 다르지만 유사한 제도가 조선에도 있었던 것이다.

◇백성에 육아봉사 기회 제공

정조는 9개의 사목에 이상의 내용을 명시한 뒤 “각 고을 수령들이 혹시라도 사목을 위반하여 제대로 거행하지 않으면, 경청(京廳)의 사례대로 도신(道臣)이 보고하여 논죄하고, 암행어사가 염탐할 때에도 일체 적발하여 되도록 무겁게 처분해야 한다”고 했다. 

고아원은 정조가 처음 만든 건 아니다. 그 이전 세종(제4대 왕·재위 기간·1418~1450년) 때도 존재했다. 1435년 6월 22일, 예조는 세종에게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길을 잃은 아이들을 수용하는 고아원 설립을 건의했다. 한양의 인구가 늘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길 잃은 아이들을 제생원(濟生院)에서 거둬들여 노비들이 보호했다. 제생원은 조선 초 백성의 질병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의료 기관으로  1397년 (태조 6년) 조준의 건의로 세워졌다. 의료·의약, 특히 향약(鄕藥)의 수납·보급과 의학교육 및 편찬사업을 맡아보았다.

하지만 노비들이 빈곤한 처지에 자기 자식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자 예조가 세종에게 건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건의는 즉각 받아들여져 제생원 옆에 고아원이 설립됐다. 세 칸짜리 집을 짓고, 한 칸은 온돌을 깔고, 다른 한 칸은 난방 시설을 하지 않고, 나머지 한 칸은 부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생원의 남녀 노비 한명씩을 붙여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옷과 이불을 비롯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도록 했다. 아울러 백성이나 천민 중에서도 자원봉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아이들을 보살펴줄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고아원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제생원 관리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했다. 

◇노인요양원과 여성쉼터도 있었다

세종은 고아들을 키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버린 부모를 처벌토록 했다. 고아원을 설립한 지 두 달 후인 8월 28일 세종은 길에 아이를 버린 부모를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길 잃은 아이를 제생원에 데려오면 포상금을 주도록 했다. 고아를 입양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감면하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실제로 같은 해 11월, 세종은 벽제 근처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즉시 사람을 보내 옷을 주고 고아원에 보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나라에서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아뿐만이 아니었다. 

1405년 태종 때는 과부와 홀아비를 비롯해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이들을 제생원에 불러들여 돌보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고아원뿐만 아니라 노인요양원과 여성쉼터까지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고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근대적인 고아원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88년 명동에 세워진 천주교 고아원이다. 세종 때 세워진 고아원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춥고 외로운 연말에 값비싼 호텔식당에서 손주들하고 맛있는 음식 사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아동보호시설을 방문해 아이들과 따듯한 정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선의 고아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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