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4] 영조의 사모곡 “파주 보광사 어실각에 새겨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4] 영조의 사모곡 “파주 보광사 어실각에 새겨진 어머니에 대한 사랑”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2.11 13:49
  • 호수 8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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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안에 자그만 사당 짓고 모친 위패 모셔…향나무도 심어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 암투 속 최후 승자는 숙빈 최씨(모친)

파주 보광사 경내에 있는 어실각. 이곳에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오른편에 200여년 된 향나무는 영조가 심었다고 한다.
파주 보광사 경내에 있는 어실각. 이곳에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오른편에 200여년 된 향나무는 영조가 심었다고 한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영조(조선 21대 왕 1694~1776년). 그러나 어머니(숙빈 최씨)에 대한 사랑만은 극진했다. 영조가 어머니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가는 파주의 한 사찰에서 잘 드러난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보광사 경내에 자그만 사당이 있다. ‘어실각’(御室閣)이다. 이곳에 영조가 숙빈 최씨 위패를 모시고 자주 찾아와 절을 올렸다. 영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라도 하듯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200여년 된 향나무가 건강한 모습으로 사당을 지키고 있다. 보광사는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 8년에 왕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천년사찰이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1670~1718년)는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딸로 서학동(현재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4세 때 고아가 돼 7살 때 ‘침방 나인’으로 입궁했다. 궁녀들 옷을 기워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의 미천한 궁중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성은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숙빈 최씨는 숙종과 사이에 모두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두 아들은 어려서 사망했고 둘째 아들 연잉군(영조)만이 살아남았다. 아들을 줄줄이 낳자 신분 상승이 돼 숙빈이 됐다. 빈(嬪)은 후궁 출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로 정1품이다. 숙빈 최씨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궁궐 내에서 여자들끼리의 암투는 드라마의 소재가 될 정도로 치열했다. 숙빈 최씨는 이런 와중에 숙종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신중하게 처신하며 지냈다.

◇장희빈 제거 위해 거짓말도

숙종은 인현왕후, 장희빈 등을 가까이 뒀다. 두 여성은 숙종의 총애를 받으려 서로 질투하고 모함했다. 서인의 지원을 받아 숙종의 정비가 된 인현왕후는 후사를 낳지 못했고, 동인의 지원을 받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째아들 이윤을 낳았다. 따라서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인현왕후가 이전에 “장희빈이 아들을 못 낳을 것”이라고 장희빈을 모함하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왕후로 책봉했다. 자연히 그 아들도 세자로 책봉됐다. 

숙빈 최씨는 서인을 등에 업고 아들의 훗날을 위해 모략을 꾸몄다. 장희빈을 제거하기 위해 “장희빈이 인현왕후 저주굿을 했다”고 숙종에게 거짓으로 일러바쳤다. 그러자 숙종은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은 폐위하고 사약을 내렸다. 

장희빈의 아들이 20대 왕 경종(1688~1724년)으로 즉위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4년여 만에 급사했다. 숙빈 최씨는 바로 서인들과 도모해 경종의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을 왕세제로 책봉케 했다. 경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다. 영조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초상화. 조선의 역대 왕 중 재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초상화. 조선의 역대 왕 중 재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영조는 왕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추숭(追崇)을 서둘렀다. 그동안 국법에 매여 어머니 제사도 지내지 못했다. 여기에 생모의 미천한 신분으로 인한 열등감도 더해졌다.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죽은 후 왕비가 될 수 있었으나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서는 안된다’고 내린 법령에 따라 왕비가 못 됐다. 그리고 아들이 왕이 된 것도 모른 채 그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영조는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짓고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셨다. 나중에 사당의 지위를 격상해 ‘육상’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육상궁’으로 격상했다. 파주 광탄면에 있는 어머니 무덤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높여 고쳤고, 지근거리에 있는 사찰 보광사를 원찰로 하고 절 안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어실각)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최효원을 영의정으로, 어머니 남양 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모친 기억해 누비옷 안 입어 

숙빈 최씨에 대한 입궁 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의 후궁이 된 후 기록은 왕자를 출산한 호산청 일기 등에 상세히 남아 있다.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담양과 정읍 일대에 신분상승 꿈을 이룬 ‘최복순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최복순은 어린 시절 이름이다. 어린 나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최복순이 담양의 용흥사에서 기도를 올려 왕자를 낳는 꿈이 이루어져 용흥사에 은혜를 갚아 번창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대각교에서 귀인인 인현왕후의 가족을 만나 훗날 궁에 들어가 소원을 이룬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정읍에는 그 만남을 기념하는 ‘만남의 광장’도 있다. 

영조는 어머니가 궁중 나인으로 일을 할 때 누비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이 각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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