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금요칼럼] 친구 L에 대한 추억 / 김동배
[백세시대 금요칼럼] 친구 L에 대한 추억 / 김동배
  •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 승인 2023.12.26 11:27
  • 호수 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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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명예교수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였지만

학생운동하다 정신질환에 걸려

평생 시달리다 별세한 내 동창

그에게 늘 빚진 마음이 들어

나를 나 되게 한 모든 이에 감사

고등학교 동창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L에 관한 이야기를 동창 모임에서 가끔 듣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다 약 20년 전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인상은 옛날 그대로인데 많이 수척해 보였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는데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에 관계하다 정신병적 문제가 발생했다. 늘 누구로부터 쫓기는 기분이라 했다. 일종의 망상장애였다.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는 힘들어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했으나 회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가 어려웠다. 

약을 복용했지만 효력이 별로 없어서 정신요양원에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30년을 살았다. 군사독재의 희생자였지만 보상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좀 호전되면 요양원 바깥에 나와 살고, 그러다 악화되면 다시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결혼은 생각지도 못했다. 50살이 넘어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형님과 여동생이 늘 신경을 써주고 정부의 장애인복지 혜택을 받아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노인복지관에서 배달되는 무료도시락으로 먹는 문제도 해결했다.

나와 같은 교구여서 교구 모임에도 나오고, 동네에서 가끔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60살이 넘으면서 파킨슨병으로 몸이 불안정했지만 대화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말은 좀 어눌했지만 논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교회 시(詩) 교실에서 동호인들과 어울려 시를 쓰는 낭만도 있었고, 교양서적을 사서 나에게 선사하는 씀씀이도 있었다. 때로 깊은 사색 끝에 나올 수 있는 얘기도 했다. 내가 그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시를 좀 써서 어느 정도 분량이 되면 내가 시집을 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자신있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내가 “거의 정상으로 보이는데 약을 끊으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약을 안 먹으면 불안 증상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그에게 교회 출석과 봉사는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교회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었고, 거의 유일한 사회생활이었다. 교우안내나 헌금위원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걷다가 가끔 넘어지기도 해 주위 분들이 걱정을 많이 했으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을 꺾지는 못했다. 나도 그에게 교회 출석하기 힘들면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 3월 말 L의 형님으로부터 갑작스러운 부고를 받았다. 일주일 전 혼자 사는 집에서 고인으로 발견되었는데, 코로나로 사망해서 빈소도 마련하지 못하고 간단히 가족장을 치르고 화장했다는 것이다. 아찔했다. 한 달 전 설렁탕을 같이 먹으면서 코로나 조심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황망히 갈 줄이야. 오랜 세월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더 자주 만나지 못한 것, 더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형님은 고인이 기독교에 심취해 50여 년간의 고단한 삶에서도 밝은 생을 이어갈 수 있었고, 그 과정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 교회 교우들에게 감사하다며 헌금을 하셨다. 고인이 여유 없는 중에도 적은 수입들을 모으고 절약해서 조금 남기고 간 것이라 하셨지만 상당한 액수였다. 그렇게도 교회를 사랑하고 의지했던 고인은 이젠 고통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L을 만난 이후 나는 그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었다. 1970년대 초 나는 3선 개헌을 획책하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에 곁다리로 데모 몇 번 참여하다가 3학년부터는 ROTC 한답시고 그쪽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다. 군사독재 정부를 전복시킨 12·12사태를 역이용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독재정권 밑에서 모두가 분노의 한숨만 푹푹 쉬면서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유학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비정상적 상황을 묵인했다. 그가 왜곡된 시대에 저항할 때 나는 내 앞길만 닦았다. 

그를 만나면 그가 나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짐까지 그가 모두 지고 간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꽃을 피우지 못했던 그의 인생은 엷은 연기와 같이 미미한 존재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를 기억하는 동창들의 가슴에 의(義)의 표상으로, 그리고 송구함과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으리라. 

늦게나마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내가 평생을 살면서 빚진 자는 L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모형제는 말할 것 없고, 내가 힘들고 방황할 때 옆에 같이 있으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준 사람들,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지혜로운 조언을 해준 사람들이 있다. 

항상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장담할 수 없는 나를 믿고 따라준 가족이 고맙고, 대단한 석학도 아닌 내 강의를 듣고 졸업한 후 지속해서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도 고맙다. 별로 재미있거나 많이 베풀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자고 연락하는 친구들도 고맙고, 능력과 혜안이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을 재단 이사나 운영위원으로 임명해주는 사회복지 관련 기관장들도 고맙다. 

나 혼자서는 결코 생존도 행복도 불가능한 세상! 아직 기력이 팔팔할 때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들을 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빚을 갚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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