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5] 조선의 한증막 “오한·중풍에 효과적… 흰쌀죽도 제공”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55] 조선의 한증막 “오한·중풍에 효과적… 흰쌀죽도 제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3.12.26 13:22
  • 호수 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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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황토로 지은 돔 형태 온돌… 소나무로 군불 때 

병 고치러 오는 백성이 주로 이용… 승려가 관리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한증소. 인천 강화군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한증소. 인천 강화군에 있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찜질방이 있었다. 세종 때 생겨난 한증소(汗蒸所)다. 세종실록 17권, 1422년(세종 4년) 8월 15일의 기록이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병든 사람으로 한증소에 와서 당초에 땀을 내면 병이 나으리라 하였던 것이, 그로 인하여 사망한 자가 흔히 있게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널리 물어보아 과연 이익이 없다면 폐지시킬 것이요, 만일 병에 이로움이 있다면 잘 아는 의원을 보내어 매일 가서 보도록 하되, 환자가 오면 그의 병 증세를 진단하여 땀낼 병이면 땀을 내게 하고, 병이 심하고 기운이 약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 하였다.”

이로 유추해보면 백성들 사이에서 한증소가 이미 널리 애용되고 익숙한 장소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찜질방처럼 땀을 배출시켜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가 아닌, 병을 고치기 위한 공간이었다. 한증(汗蒸)이란 질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몸을 덥게 하여 땀을 내는 것을 말한다. 

한증소는 돌과 황토로 만들어졌다. 둘레 18m, 높이 2.5m에 1.2m 두께의 돌을 쌓아 올렸다.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돔 구조는 안정감을 주고 열을 잘 전도시킨다. 온돌을 깔아 소나무를 때 내부를 뜨겁게 데웠다. 소나무는 풍증과 신경통에 좋다고 한다. 바닥에도 솔잎을 깔았다. 환자들은 가마니, 헝겊 등을 몸에 두르고 들어가 솔잎 위에 몸을 누이고 땀을 냈다. 오한이 있거나 미열이 있는 환자들에게 효과적이었고, 중풍이나 기혈이 막힌 환자들에게도 좋은 치료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관청 ‘활인원’은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구료사업을 담당했다. 동소문 밖에 동활인원이, 서소문 밖에 서활인원이 각각 있었다. 이 둘을 묶어 ‘동서활인원’이라고 불렀고, 두 활인원에 한증소가 하나씩 있었다.  

한증소를 관리하는 이는 스님이었다. ‘한증승’(汗蒸僧)이라고 불렸으며, 각 사찰의 주지 급이 이 일을 맡았다. 한증승에게 당시 급여의 일종인 요(料)가 지급된 것으로 보아 임시직 공무원인 듯하다. 한증승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 분야를 관장했던 관청인 전의감의 관리들과 일반 백성들을 치료했던 기관인 혜민국의 의원들과 함께 일했다. 

한증소에선 죽도 제공했다. 흰쌀죽은 영양을 공급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땀을 더 잘 내게 하는 작용도 있다고 한다. 추위와 찬 기운을 싫어하고 열이 나며, 두통과 땀이 나는 비교적 허약한 체질의 환자에게 쓰는 ‘계지탕’(桂枝湯)이 있다. 감기 초기에 먹는 한약으로 계피·생강·대추가 주성분이다. 이걸 복용 후 땀을 충분히 잘 내라고 흰죽을 먹이는 것이다. 

한증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자 당시 한증소 관리를 담당했던 승려 중 한 사람인 일혜스님이 한증소를 하나 더 늘려달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 나머지 하나는 사대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와 더불어 욕탕인 ‘석탕자’(石蕩子·돌로 만든 욕조)도 만들었다. 세종실록에 관련 기록이 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과거에 지은 한증 목욕실은 너무 좁아서 남녀가 많이 모인다면 병을 치료하지 못한 사람이 퍽 많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선사 일혜 등이 존비(尊卑) 남자와 여자의 한증 목욕실을 구분하게 하여 세 곳을 더 짓고 이내 ‘석탕자’를 설치하려고 하나 힘이 모자라 이루지 못하니 원컨대 풍저창의 쌀 100석과 전농시의 면포 100필을 빌어 주어서 짓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한증소에서 자꾸 사람이 죽어나가자 사회 문제가 됐다. 세종실록에 “예조에서 계하기를, 동서 활인원과 서울 한증소에서 승인이 병의 증상은 묻지 않고 모두 땀을 내게 하여 왕왕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게 하니 이제 한증소를 문밖에 한 곳과 서울 안에 한 곳을 두고,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의 의원을 한 곳에 두 사람씩 차정(差定·사무를 맡김)하여 그 병의 증세를 진찰시켜 땀을 낼만한 사람에게는 땀을 내게 하되, 그들이 상세히 살피지 않고 사람을 상해시킨 자는 의원과 승인을 모두 논죄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있다.

한증소는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한증소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병을 고치는데 한계가 있자 백성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듯하다. 한말 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그림에 한증소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까지도 한증소가 있었고, 한증승도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대중목욕탕이 들어오면서 한증소가 밀려난 것으로 추청한다. 

유일하게 한증소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난정리에 위치한 수정산 한증소가 그것이다. 1960년대까지도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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