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악랄하게 진화한 현대판 조리돌림
[백세시대 / 문화이야기] 악랄하게 진화한 현대판 조리돌림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4.01.02 09:50
  • 호수 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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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 기자]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지난 1961년 5월 21일,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혁명재판을 연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아래 패악을 저지르던 무리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중에는 ‘정치깡패’ 이정재도 있었다. 그는 11개 범죄 행위로 기소됐고 결국 범죄 단체 수괴로 인정되면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판결 직후 이정재는 위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서울시내 한복판을 행진하며 일명 ‘조리돌림’을 당했다. 근현대사에 가장 유명한 조리돌림 사건으로 당시 현장을 찍은 사진과 함께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조리돌림은 경북 북부 지방 일원에서 행해진, 사회적 규범을 위배한 사람을 처벌하는 사회통제 방식이었다. 

전남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화지게’라는 관행이 있었다. 마을어른들이 발의해 동리회의를 거쳐 처벌을 결정했다. 이후 마을사람들을 모은 뒤 죄를 지은 사람의 등에 북을 달아매고 죄상을 적어 붙인 다음, 농악을 앞세우고 마을을 몇 바퀴 돌며 그 죄를 마을사람들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창피를 주어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이와 같은 행위의 재발을 방지하고 공동체적 촌락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소극적인 사회제재 방식이었다. 단, 죄를 지은 주민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전통적인 조리돌림은 사라졌지만 보다 잔인한 방식으로 진화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조리돌림이 한 마을에 국한된 반면 현재의 조리돌림은 온라인을 통해 한 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씁쓸한 것은 ‘알 권리’를 들먹이며 언론들이 앞장선다는 것이다. 

가령 A라는 유명인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면 이에 대한 사실 보도는 대중들의 알 권리를 위한 언론의 역할이 맞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나오는 입증되지도 않은 자극적인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해 마치 유죄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러한 자극적 정보는 각종 커뮤니티와 SNS를 타고 무분별하게 확산되며 당사자를 조리돌림하는데 사용된다. 

최근 ‘기생충’으로 유명한 이선균 씨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던 그는 또 다른 범죄 피의자인 한 제보자의 일방적 증언 외에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수차례 경찰에 불려다니며 여론재판에서 사실상 유죄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알 권리를 핑계 삼은 자극적 보도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러한 조리돌림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그의 죽음을 더욱 슬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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