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위에 김대중’… 청년사업가, 실패한 정치인, 사형수, 그리고 대통령
영화 ‘길위에 김대중’… 청년사업가, 실패한 정치인, 사형수, 그리고 대통령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4.01.15 13:51
  • 호수 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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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 아픔 딛고 의원 배지 달았지만 군부 탄압으로 4차례 죽을 위기

단일화 실패·3당 합당 밀려 정계은퇴… 15대 대통령으로 국난 극복 

이번 작품에서는 출생부터 1987년 광주광역시를 방문하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을 조명한다. 사진은 1987년 광주광역시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
이번 작품에서는 출생부터 1987년 광주광역시를 방문하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을 조명한다. 사진은 1987년 광주광역시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1924년 1월 6일, 전남 목포 앞 바다에서 뱃길로 3시간 남짓 떨어진 하의도에 살던 김운식‧장수금 부부 사이에서 둘째 아들이 태어난다. 부부는 아들 이름을 ‘대중’이라 짓고 교육을 위해 육지인 목포로 이주했다. 일본 학생들의 텃세에도 굴하지 않고 지역 명문인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한 아이는 졸업 후 일제 징용을 피해 전남기선주식회사에 취직했다. 광복 이후에는 배 한 척으로 사업을 시작해 지역신문인 목포일보 사장을 지내는 등 사업가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청년사업가’였던 김대중이 한국 정치계의 거목이 될 줄은 말이다.   

목포일보‧해운회사 사장 지내

김대중 전 대통령(1924∼2009)의 정치 인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1월 10일 개봉하면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다시 재조명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출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이 작품은 어린 시절부터 청년사업가를 거쳐 정치인 김대중으로 거듭나기까지와 박정희·전두환 독재체제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떠오른 1980년대까지를 다룬다.

배우 장현성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작품에서는 김대중평화센터에 보관하는 사진·영상·문서, 김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녹음한 회고록 육성자료 등이 공개됐다. 특히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1982년 10월 이희호 여사가 안기부 간부와 함께 ‘김대중내란음모 조작사건’(1980)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을 찾아와 미국 망명을 설득하고 망명 결정에 대한 서약서를 쓰는 과정이다. 

또 권노갑·김상현·한화갑 전 의원 등 정치적 동지들뿐 아니라 첫 부인 차용애의 가족 등 30여명이 인터뷰에 응해 인간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을 회고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미국의 한국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가 나와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는 내용도 담겼다.

목포일보와 해운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기업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1956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장면(1899∼1966) 전 총리를 만나 정계에 진출한 것이다. 다만 DJ의 정치 도전은 녹록지 않았다. 4‧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잇달아 참패한 데다가 조강지처 차용애 여사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며 성공한 청년사업가에서 실패한 정치인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천신만고 끝에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의원 금배지를 달았지만 이틀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선서도 못한 채 첫 임기를 마감했다.

이후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그는 1963년 민주당 소속으로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 정무위원 겸 대변인을 거쳐 그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총망받는 젊은 정치인으로 성장한다. 

결국 1970년 치러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파란을 일으켰고 대선 후보자에 지명됐다. 이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40만표를 얻었지만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하고 만다. 

대선에서의 선전으로 박 전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된 그를 기다린 것은 꽃길이 아닌 가혹한 탄압이었다. 투옥과 연금, 살해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재야 인사, 민주 투사의 길을 걸으며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을 얻는다.

6차례 옥고, 2차례 망명길

박정희 정권에서 신군부에 이르기까지 그는 55차례의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2차례의 망명을 감수하면서 총 4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중 일본 망명 중이었던 1973년 8월, 동경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당해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일화로 유명하다.

또한 1980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해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당시 최후 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다행히 국내 여론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석방압력을 가하면서 전두환 정권은 결국 1982년 12월 그를 석방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망명길에 오른 그는 미 전역을 돌며 활발한 강연활동을 펼치며,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다. 1985년 귀국해 2‧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 1987년 6월 항쟁 등으로 대통령 직선을 이뤄내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정권교체의 호기를 놓치고 만다. 

3당합당과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정계를 떠났던 DJ는 1995년 6월 지방선거의 지원유세에 나서 조순 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킨다. 이를 기점으로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어 온 국민이 ‘외환위기 사태’로 씨름하던 1997년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단일화를 이뤄내며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는 37년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낸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IMF를 졸업했으며, 2000년 6월15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며 그의 대북정책은 꽃을 피운다. 같은 해 햇볕정책과 한국 인권향상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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