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9] 겨울나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209] 겨울나기
  •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 승인 2024.01.22 09:57
  • 호수 904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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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외진 곳, 무슨 일인들 청진하지 않으랴.

세모에 술병만 늙은이와 짝하네.

시은 다 되어 적막한 게 점점 좋아지니

가난 아랑곳 않고 느긋한 걸 조롱치 말라.

엄동설한에 굶은 닭은 모이 찾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병든 말은 땔감 운반 못 하네.

해가 길어져 얼음이 다 녹기를 기다렸다가

봄에 낚시대 하나 메고 교외 못에 가야지.

窮居何事不淸眞(궁거하사불청진)

歲暮甁罍伴老身(세모병뢰반노신)

漸喜寂寥成市隱(점희적요성시은)

莫嘲疏緩任家貧(막조소완임가빈)

鷄飢雪凍難尋粒(계기설동난심립)

馬病天寒叵運薪(마병천한파운신)

會待日長氷泮盡(회대일장빙반진)

一竿歸及野塘春(일간귀급야당춘)

-임상원(任相元, 1638~1697), 『염헌집(恬軒集)』 〈세모(歲暮)〉


임상원(任相元)은 인조대 소론 문인으로 최석정(崔錫鼎), 최석항(崔錫恒),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1688년(숙종14) 남구만 등이 견책당했을 때 도승지의 직책으로 쟁집(爭執)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장단 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도 민암(閔黯)을 논핵한 김중하(金重夏)에 대해 논계(論啓)를 정지하였다는 일로 대사헌 유하익(兪夏益) 등에게 논핵당하자 광주(廣州)에서 5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이 시는 그가 두문불출하던 1691년(숙종17)에 지었다.

수련에서 임상원은 은거의 즐거움에 대해 읊었다. 명리의 격전지인 서울에서 벗어나 광주에서 두문불출하니 마음이 깨끗하고 거짓이 없어졌다고 서술하였다. 두문불출 하다보면 적막하고 느긋한 생활을 지내며 마음 속 불화와 불평이 저절로 풀리지만, 반대급부로 반드시 가난을 불러온다. 사람은 일을 하여 재화를 벌어들여야 집안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 고금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경련의 닭과 말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인 듯하다. 겨울철 닭들은 주린 배를 참으며 모이를 찾지만 허탕 치고, 말도 먹은 게 없어 땔감을 지고 나를 힘이 없는 상태이다. 이대로라면 끼니도 거르고 온돌도 달구지 못한 채 겨울을 보내야 하지만 임상원은 오히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교외 못에 낚시하고 돌아오겠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쯤 되면 태연하다 못해 게으르고 아둔하다고 할 정도이다.

임상원이 언급한 시은(市隱)은 속세에 살면서 속세와 한 발짝 떨어진 시각에서 자유를 누리는 은자를 말한다. 이들은 바로 그 한 발짝 떨어진 시각이 주는 통찰력으로 세상을 아등바등하게 살지 않고 긴 호흡으로 흐름을 보면서 살아간다. 또한 이렇게 현실 너머의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는 마음가짐은 『논어』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선진(先進)편에서 공자와 제자들의 정치관(政治觀)을 묻고 답하는 에피소드이다. 공자가 자로(子路), 염구(冉求), 공서화(公西華) 등에게 등용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각기 국방, 농업, 외교 방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 증석(曾皙)은 엉뚱하게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공자는 증석의 대답만 인정하는데, 이것은 증석만 난세 이후의 삶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는 증석의 모습과 봄이 되어 교외에 낚시하러 가는 임상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느새 12월이다. 올해도 다 지났다. 펜데믹은 지나갔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여파는 현재 진행 중이다. 고도 경제 성장은 한풀 꺾여 인구 절벽에 가계부채 등으로 뒤숭숭하고, 바다 건너에서는 지금도 전쟁이 한창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전 지구적 연합을 중시하였는데, 이제는 나라별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시대적 겨울인 것이다. 겨울에는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준비하여 마련한 것으로 견뎌야 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겨울을 지낼 때는 인내만 해서는 안 되고 자기만의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대부분 음주와 시짓기였지만 오늘날은 훨씬 다양한 취미활동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이다. 돈이 많은 부자보다 취미가 많은 부자가 인생의 겨울을 그리고 시대의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승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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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4-01-23 01:08:51
물욕 없는 맑고 깨끗한 기상을 가리킨다.@필자의견: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증점(증석)이 공자님곁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점입니다(舞雩 詠而歸). 그래서 공자님께서는 벼슬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세 제자의 희망도 각자의 희망대로 소극적으로나마 인정해주셨지만, 공자님곁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증점(증석)의 희망도 반영하시고, 나는 點(증점)과 함께 하겠다고 맞장구를 치신것으로 판단됩니다(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즉 전체적으로는, 허심탄회한 사적인 대화에서, 네 제자의 희망사항이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윤진한 2024-01-23 01:06:55
두산백과 욕기지락[浴沂之樂]편에, 적절한 시대상 반영한 해석이 있고 추가 설명이 있어서,, 이를 인용하였습니다.
추가 설명은 이렇습니다.
네 사람이 대답하였으나 공자는 오직 증점의 말에만 동의하였다. 다른 세 사람은 한 나라에서 벼슬을 얻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중심으로 얘기했지만, 증점만은 일상생활의 편안함, 어른과 아이가 모두 편안하게 자연에서 즐기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뜻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와 관계된 내용으로써 포부를 밝힌 세 사람과 달리, 사람들과 더불어 자연 속에 노니는 욕심 없는 생활을 바란다는 말 속에서 천지만물과 통하는 성인과 같은 기상이 보인 증점을 공자가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전하여 욕기지락이라는 말은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위 고사에 보이는 증점의

윤진한 2024-01-23 01:06:13
풍족하게 할 수 있으나 예악(禮樂)에 있어서는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 “적(赤, 공서화)아, 너는 어떠하냐?” “제가 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원하는 것들입니다만, 종묘의 일에 또 제후들이 회동할 때에, 현단복(玄端服)과 장보관(章甫冠) 차림을 하고 작은 집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점(點, 증점)아 너는 어떠하냐?” 옆에서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이 비파를 놓고 일어나 대답하였다. “늦봄에 봄옷을 만들어 입고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를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에 공자가 감탄하며 “나는 증점과 함께하겠다.” 라고 하였다.
한글 해석은 두산백과

윤진한 2024-01-23 01:05:21
제자 자로(子路),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공자가 말했다. “내 나이가 너희들보다 많다 하여 그 때문에 말하기를 어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는데 만약 내가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이에 자로가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전투용 수레 천 대를 가진 제후국이 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침략을 받고 전쟁이 이어져 기근이 드는 상황일 때, 제가 다스리면 3년 안이면 백성을 용맹하게 할 수 있고 또 의리(義理)로 향할 줄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공자가 웃었다. “구(求, 염유)야, 너는 어떠하냐?” “사방 6,70리, 혹은 5,60리쯤 되는 작은 나라를 제가 다스리면 3년에 이르러 백성들을 풍족하

윤진한 2024-01-23 01:04:30
@子路曾皙冉有公西華侍坐.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居則曰 ‘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子路率爾而對曰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夫子哂之. “求, 爾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赤, 爾何如?”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點, 爾何如?” 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曾晳曰 “夫三子者之言, 何如?”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 출처:논어 선진(先進)편 25장.

어느 날 공자의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