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의 항해’ 전, ‘기록 사진’ 넘어 ‘연출 사진’의 시대 연 구본창의 예술
‘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의 항해’ 전, ‘기록 사진’ 넘어 ‘연출 사진’의 시대 연 구본창의 예술
  • 배성호 기자
  • 승인 2024.02.02 13:21
  • 호수 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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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진의 개척가… 43개 작품 시리즈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  

사진계에 파란 일으킨 ‘탈의기’ 시리즈, 달항아리 담은 ‘문라이징Ⅲ’ 등

이번 전시에서는 ‘연출 사진’을 통해 한국 현대사진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번 전시에서는 ‘연출 사진’을 통해 한국 현대사진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구본창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사진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의 모습.

[백세시대=배성호 기자] 지난 1988년 서울 워커힐미술관(‘아트센터 나비’의 전신)에서 ‘사진 새시좌’ 전이 열렸다. 김대수‧이규철‧이주용‧임영균‧최광호‧하봉호‧한옥란, 그리고 전시를 기획한 구본창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한국 사진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사회적 사건의 기록이나 실제 대상을 피사체로 삼기보다 자신의 내적 의지에 따라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일명 ‘연출 사진’(making photo)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진은 만드는 것인가(연출 사진) 아니면 찍는 것인가’ 논쟁으로 불붙었고, 이 전시회는 한국 현대사진의 원류가 된 전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진 발전의 큰 역할을 한 구본창(71)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3월 10일까지 진행되는 ‘구본창의 항해’ 전에서는 평생 제작해 온 50여개 시리즈 중 총 43개 시리즈(500여점)와 600여점의 관련 자료 등 방대한 전시품을 통해 한국 현대사진의 개척자로 불리는 구본창 작가의 평생에 걸친 작품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흑백 사진 ‘자화상’에서부터 시작된다. 1972년 여름, 경남 남해 상주 해수욕장에 앉아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지켜보는 깡마른 청년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던 그날 구본창 작가는 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할 것을 다짐했다. 실제로 연세대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던 그는 반년만에 퇴사해 독일로 사진 유학길을 떠났고, 예술사가로서 항해를 시작했다.

‘자화상’을 지나치면 작가의 어린 시절 수집품을 모아놓은 ‘호기심의 방’에서부터 시작해 젊은 날의 자화상과 독일 유학 시절 작품, 그리고 스냅사진 시리즈를 모은 ‘열린 방’으로 이어진다. 

또 구본창 작가의 생애, 작품 시리즈별 제작 계기, 국내외 전시 개최 배경 등을 정리한 연보를 제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먼저 ‘호기심의 방’에서는 책, 포스터 등 내성적이었지만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 수집해온 자료와 이를 촬영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과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가져온 인쇄물, 밥 딜런의 레코드판을 비롯해 마당에서 발견한 그릇 조각, 일회용 조미료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집품을 통해 후에 사진작가로서 표출되는 그의 독특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이어지는 ‘모험의 여정’에서 독일 유학 이후에 제작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돈을 모아 다녀왔던 런던, 파리, 베를린 여행기록을 담은 초기 유럽 시리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새시좌’ 전에서 선보인 ‘탈의(脫衣)기’ 시리즈다. 해변에 뒹굴던 밧줄 꾸러미로 탈의한 자신을 옭아맨 후 이를 벗어나 변화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실험적으로 표현했다. 한 컷의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직접 퍼포먼스를 하면서 촬영한 중형 크기의 필름을 긁거나 두 개의 필름을 겹치고, 혹은 사진용 물감을 이용해 조색한 뒤에 합친 하나의 필름을 다시 인화해 완성했다.

1988년 제작한 ‘탈의기 01’.
1988년 제작한 ‘탈의기 01’.

자아에 대한 탐색과 더불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지속했던 구본창 작가의 작품 세계는 1996년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해갔다. ‘하나의 세계’와 ‘영혼의 사원’에서는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며, 시각적 작품이나 매체적 실험에 집중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연의 순환을 주제로 고요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응축한 작품을 선보인다.

일본 교토의 대웅전 외벽을 통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시간의 그림’(1998~2001)과, 사물이 빠져나간 빈 곳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인테리어’ 시리즈(1998~2015) 등은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구본창 작가의 미학을 보여준다. 

1998년 탈을 촬영하며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조선백자, 공예품, 지화 등 사물에 담긴 ‘삶의 흔적’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제작한다. 이중 각기 다른 박물관에 있는 달항아리를 피사체로 삼아 다양한 흑백조로 촬영해 마치 달이 뜨고 지는 듯한 풍경으로 재해석한 ‘문라이징Ⅲ’(2004~2006)가 대표적이다. 각기 다른 흑백조로 나란히 놓여 마치 달이 뜨고 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으로 달항아리의 아름다움만이 아닌 구본창 작가의 발상과 표현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이방인으로서 낯선 유럽 도시의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고, 고향에서 돌아와서도 몰라보게 달라진 생경한 도시 풍경을 역시 ‘이방인’의 시선으로 쫓았다. 전시 마지막 공간인 ‘열린 방’에서는 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가 낯선 이방인의 감각으로 포착한 ‘익명자’ 시리즈 작품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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