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동백아가씨’ 작곡가 ‘백영호 기념관’
[백세시대 / 세상읽기] ‘동백아가씨’ 작곡가 ‘백영호 기념관’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2.26 10:46
  • 호수 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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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맨발의 청춘’, ‘빨간 구두 아가씨’,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등 서구풍의 노래가 대세였던 시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트로트 ‘동백아가씨’. 개인적으로 이 노래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히트하게 됐는지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백영호(1920~2003년)의 아들 백경권(진주 서울내과의원 원장)이 최근 펴낸 ‘동백아가씨의 영원한 연인, 작곡가 백영호’(윤진)에 전후 내막이 상세히 밝혀져 관심을 끈다. 

부산에서 VIP 대접을 받으며 활동하던 백영호를 서울에선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최무룡이 부른 ‘5월의 남산’ 등 신곡도 저조한 가운데 서울에서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영화제작자가 백영호를 찾아왔다.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 ‘동백아가씨’를 영화로 만들려고 하니 주제가를 만들어달라며 시나리오를 건넸다. 연속극은 울릉도 해양경비대원의 로맨스이지만 영화에선 육지의 부잣집 아들이 섬 처녀와 맺은 러브 스토리로 각색됐다. 

백영호는 제목부터 마음에 들어 바로 작곡에 들어갔다. 완성된 가사를 본 영화감독의 요구로 2절 가사를 1절 가사로 대체하고, 1절의 2연 가사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꽃’을 ‘동백아가씨’로 바꿨다. 그러고도 몇 차례 수정을 더해 일주일 만에 멜로디를 완성했다. 

노래 취입 과정도 녹록치 않았다. 음반사인 지구레코드사는 경영난을 겪고 있었고, 밴드비 조차 없어 외상으로 했고, 신인가수 이미자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으로 녹음실 마이크 앞에 섰다. 

1964년 8월, 난관을 극복하고 3개월 만에 음반이 나왔고, 영화도 서울 을지로극장에 걸렸다. 백영호는 자존심과 체면을 버린 채 직접 청계천의 레코드 상점, 광화문 일대의 다방 등을 찾아다니며 홍보에 나섰다. 하루는 저녁을 먹은 뒤 아내에게 1000원을 얻어 레코드 7~8장을 옆에 끼고 집을 나섰다. 

우연히 만난 작곡가 박시춘으로부터 “동백아가씨 제목이 유치하잖아, 요즘 시대하고 안 맞아. 집어치우고 우리하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는 말을 듣자 맥이 풀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남편을 보고 아내가 “남의 말을 듣고 포기하고 돌아오는 당신도 그런 사람과 똑같다”며 “마음 단단히 먹고 다시 나가보라”고 독려했다.

백영호는 다시 집을 나와 무교동의 음악다방 ‘쎄시봉’을 찾았다. 노래를 틀어주는 DJ 박스에 신청곡을 들이밀었지만 2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차례 부탁한 끝에 겨우 ‘지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왔다. 전주가 나오는 순간 어둡고 시끌벅적했던 홀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 손님이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연주 내내 적막이 흘렀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이후 DJ는 7~8차례 ‘동백아가씨’를 틀어댔다. 백영호가 DJ 박스로 다가가 음반을 돌려달라고 하자 “신청이 줄을 잇고 있어 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백영호가 “기념으로 레코드판을 기증하겠다”고 하자 종업원이 서비스로 위스키를 한 잔 내놓았다. 팝송과 클래식 음반만 들어야 제 맛이었던 장소에서 ‘뽕짝’을 밤 새 들을 줄 누가 알았으랴.

백영호는 그곳을 나와 소공동 한국은행 옆 건물 지하 다방에 들어가 ‘레지’에게 음반을 보여주며 틀어 줄 것을 요구했다. 레지가 카운터를 지키는 마담에게 급히 달려가 레코드판을 보여주며 “오늘 언니가 못 산 그 레코드판 아니냐”고 했다. 백영호는 “동백아가씨를 어떻게 샀느냐”고 묻는 마담에게 “노래가 좋냐”고 되물었다. 마담이 “방송에 나오는데 기가 막힌다”고 대답했다.

광화문 동아방송 앞 다방, 종로의 단성사 극장 근처 다방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시내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아내는 “거보세요, 박시춘 그 양반이 뭘 안다고 큰소리를 치냐”고 말했다. 

백경권 원장은 “일제강점기 이래 단일 레코드 음반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건 ‘동백아가씨’가 처음 일 것”이라며 “가난 속에서 성장한 아버지의 부단한 노력과 가요 발전을 견인했던 동아방송의 선견지명 덕”이라고 했다. 영화도 연일 만원사례였다. 

백 원장은 지난 5년간 낮에는 진료하고, 밤에는 부친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원고를 써 360쪽에 달하는 두꺼운 ‘백영호 평전’을 발간했다. 그의 집념과 수고로 대중가요사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오는 10월 부산 근현대역사관에 악보와 레코드, 구술 자료 등을 모아놓은 ‘백영호 기념관’이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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