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2] 남명 조식의 지리산 유람 “북 치고 피리 불며… 기생과 대열 이뤄 산을 오르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2] 남명 조식의 지리산 유람 “북 치고 피리 불며… 기생과 대열 이뤄 산을 오르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3.11 13:29
  • 호수 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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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학자,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평생 강학에 전념

지리산 10회 이상 오를 정도로 좋아해…묘지도 지리산 자락에

진주문화원서 남명 유람 코스 그대로 따라가는 문화탐방 열기도

남명 조식이 말년을 보낸 산천재. 경북 산청군 덕산에 있다.	 사진=한국관광공사
남명 조식이 말년을 보낸 산천재. 경남 산청군 덕산에 있다. 사진=한국관광공사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년)은 생전에 지리산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지리산을 열두 번이나 올랐다. 태어난 곳은 합천군 삼가면 토동이지만 말년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에서 보냈고 묻힌 곳도 산청군 덕산이다. 

남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1520년 사마시 초시와 문과 초시에 합격했다. 1526년 부친상을 마치고 의령의 산사에서 공부했다. 1531년 생계가 곤란하자 살림이 넉넉한 김해의 처가를 찾아가 정자를 지어놓고 생활하기도 했다. 

1539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전성서주부에 특진됐어도 나아가지 않았고, 관직을 받으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했다.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그에게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561년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으로 들어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전념했다. 왕이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상서원판관에 임명돼 입조했으나 그것마저 학문의 도리를 논하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집어치우고 낙향했다. 

남명은 ‘좌퇴계 우남명’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로 경의(敬義)를 사상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학문의 실천에 주력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이 추증됐다. 저서로는 ‘남명집’·‘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다. 

◇진주-섬진-쌍계로 들어가는 코스

남명은 57세 때인 1558년 4월11~26일, 15박16일 동안 진주 목사 김홍, 고령 현감 이희안, 청주 목사 이정, 인숙, 강이 등 40여명과 함께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460여년 전 남명이 성찰하며 걸었던 길을 따라가 본다.

남명은 진주에서 출발해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로 들어가는 코스를 택했다. 일행은 하동군 악양을 지나 삽암(鍤岩)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남명은 삽암에서 고려시대 무신 최충헌의 집권기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킨 한유한의 충절을 기렸고, 도탄에 이르러선 선배 사림파 학자 정여창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새벽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 섬진에 다다랐다. 잠을 깨었을 때는 벌써 곤양 땅을 지나버렸다. 아침 해가 떠오르니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 푸른 산의 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었다. 퉁소와 북으로 다시 음악을 연주하니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멀리 구름 낀 산이 서북쪽 10리 사이에 나타났는데 이것이 두류산(지리산)의 바깥쪽이다. 이곳에 녹사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 왕조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중략).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인숙과 강이는 모두 병 때문에 그만 두었다. 이것으로 보면 진실로 십분 뛰어난 절경은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명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白), 이(李) 양군이 동행했다. 북쪽으로 오암을 올라 나무를 잡고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을 타면서 나아갔다. 원우석은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이들을 따라가면서 전대(前隊)를 이루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전진하면서 중대를 형성했다. 강국년과 요리사와 종들과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이 후대를 만들었다. 중 신옥이 길을 안내하면서 갔다.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 보고 자책도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바로 이곳이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이르는 곳이다. 바위로 된 멧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뻗어서 굽어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깎아내려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아가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좌우상하에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다시 한 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합치기도 했다.” 

남명은 여행 중에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힘든 현실을 목격했다. 백성과 군졸이 일정한 거처 없이 계속 떠돌아다니는 현실에서 자신은 한가로이 유람하는 것을 자책하기도 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이 모두 두류산 중심에 있어 푸르고 높고 가파른 고개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하여 밥 짓는 연기가 드물게 닿을 것 같은데도 오히려 이곳까지 관가의 부역이 폐지되지 않아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왕래함이 계속 잇달아서 모두 흩어져 떠나가기에 이르렀다. 절의 중이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써서 조금이라도 완화해주기를 청했다. 그들이 호소할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편지를 써주었다. 산의 중이 이와 같으니 산촌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가히 알 만하다. 행정은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하여 백성과 군졸이 유망(流亡·거처 없이 떠돌아다님)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보호하지 못한다. 조정에서 이를 크게 염려하는데 우리 일행이 그들의 등 뒤에 있으면서 여유자작하게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한편 진주문화원(원장 김길수)이 2022년 10월 20일에 주관한 ‘남명 조식선생 두류산 유두류록(遊頭流錄) 여정 문화탐방’에 200여명의 많은 회원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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