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3] 왕의 일기 ‘일성록’(日省錄) “정조의 어릴 적 일기에서 시작…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3] 왕의 일기 ‘일성록’(日省錄) “정조의 어릴 적 일기에서 시작…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3.18 13:56
  • 호수 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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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 역대 왕들의 일기 모아 

가뭄·홍수 등 구호 대책, 백성의 민원 처리 사항 등 수록

정조 “매일 세 가지 기준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 남긴다”

조선 왕들의 일기 ‘일성록’.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조선 왕들의 일기 ‘일성록’.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조선의 왕들은 일기를 썼다. ‘일성록’(日省錄)이다. 1760년부터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150년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다른 점은 두 기록물이 사관들에 의해 쓰인 반면 일성록은 왕이 직접 썼거나 지시하고 확인을 거쳤다는 점이다. 일성록은 1973년에 보물 제153호로 지정됐고,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일성록의 모태는 정조(조선 제22대 왕·1752~1800년)가 세손 때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다. 정조는 논어편의 증자(曾子) 말에 자극을 받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증자는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라고 했다. 정조 역시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일기를 작성했던 것이다. 정조가 경희궁의 존현각에 머물며 일기를 써 ‘존현각일기’라는 제목이 붙었다.

일성록은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 국왕의 동정과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린 말, 암행어사의 지방 상황 보고서, 가뭄·홍수의 구호 대책, 죄수에 대한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에서의 민원 처리 사항 등을 월별일로 기록했다. 

◇‘여’(予·나)자가 왕이 썼다는 증거

일성록의 특징 중 하나가 ‘여’(予)라는 글자이다. 여는 ‘나’를 지칭하는 단어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상’(上)과 대비된다. 즉 왕 스스로가 썼다는 증거이다.

1791년 3월 5일 일성록은 나이가 많아 자리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좌의정 이원복을 설득하는 정조의 망극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성정각에서 시원임(현직의 시임 벼슬아치와 전직의 원임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 대신과 규장각 벼슬아치를 소견했다. 내가 이르기를 ‘근일 바람이 많이 불어 강나루에 배가 다닐 수 없는데 수향(受香·제사를 지내기 앞서 임금에게 향과 제문을 받던 일) 행차가 모두 노량을 통해 건넜다고 하니 노량은 평온한 나루라 하겠다. 이로써 보건대 주교를 노량에 설치한 것은 참으로 잘하였다’ 하니 이원복 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복원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감히 나이를 들어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깊이 헤아려주시는 은덕을 입는 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경은 한 번 생각해 보라. 오늘날 조정의 모양이 실로 말이 되는가. 좌의정의 근력이 다행히 남들과 달라 지금 홀로 정승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홍 영돈녕과 서 판부사는 모두 병들고 늙었으니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 경의 청을 어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홍 영돈녕의 간청도 들어주지 않았다. 영돈녕은 경에 비해 근력이 더욱 쇠퇴하여 진실로 그 뜻을 한결같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니 경의 근력과 범절은 영돈녕에 비할 바가 아니니 결코 갑자기 허락하기 어렵다’ 하였다. 채체공이 아뢰기를 ‘단종의 능에 절개를 다한 사람에 대해 칭찬하여 장려한 조처는 매우 성대한 덕의였으니 어찌 이루 다 흠앙하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혹 누락된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경은 모쪼록 고적을 살펴서 보고 듣는 대로 보고하라’ 하였다.”

◇흑산도 ‘닥나무 세금’ 해결도 기록에

조선에 ‘격쟁’(擊錚)이란 제도가 있었다. 어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징이나 꽹꽈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후 직접 왕에게 호소하는 방법이다. ‘신문고’는 신하들의 손을 거쳤지만 격쟁은 직접 왕의 면전에 대고 전후 사정을 토로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특히 정조 때 격쟁이 활성화가 돼 행차 길에 백성들이 장사진을 이루곤 했다. 

흑산도에 살던 김이수(金理守· 1743~1805)라는 평민이 섬 주민을 대표해 민원을 임금에게 알리려 격쟁(擊錚)을 울렸다. 정조가 이를 수용해 해결해줬다는 기록이 일성록에 남아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부속 대둔도)에 살던 김이수는 불합리한 세금 제도로 섬 주민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가장 큰 고통은 ‘종이 세금’이었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주원료다. 당시 흑산도 성인남자 한 사람이 바쳐야 하는 세금은 닥나무 마흔 근에 해당하는 종이. 남자가 많은 집이 생업까지 포기하고 닥나무를 캐, 삶아서, 칼로 베어내 종이를 만들어도 세금을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와 김이수의 민원 내용을 검토한 후 암행어사를 현장에 내려 보내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사건 발생 4개월 후, 이른 새벽 정조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고 받았다. 

“흑산도의 양민 김이수가 꽹과리를 울려서 호소한 사건이옵니다. 근래의 닥나무가 절정 되어 실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수납하게 하니 섬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지방에서 사다가 바치고 있다고 하옵니다. 흑산도의 종이세를 영원히 폐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사료 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다면 해당 관청은 없어진 세금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오니 백성의 폐단을 제거하다보면 윗사람에게는 손해가 날 때가 많사옵니다.”

그러자 정조는 “아래에서 이익이 된다면 좋은 것이 아닌가. 위에서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어찌 그것을 꺼릴 것인가”라면서 김이수의 손을 들어줬다. 

흑산도 주민들도 김이수의 용감한 행동으로 과중한 종이세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일성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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