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은 걷다 64] 영조의 50회 생일잔치 ‘어연’(御宴) “왕세자가 삼가 천천세를 축수합니다”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은 걷다 64] 영조의 50회 생일잔치 ‘어연’(御宴) “왕세자가 삼가 천천세를 축수합니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3.25 13:17
  • 호수 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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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3년 9월 16일 오전 7~9시 창경궁 명정전서 성대하게 열려

왕세자와 신하들 술 7잔 바쳐… 세종이 작곡한 ‘여민락’ 연주

영조는 잔치 중간에 실수하는 신하와 내시에 벌주라고 지시도

영조의 오순잔치인 ‘어현’을 그대로 재현했다. 왕이 행사장에 나가고 있다.
영조의 오순잔치인 ‘어연’을 그대로 재현했다. 왕이 행사장에 나가고 있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주상이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다. 여(輿·임금이 타는 가마)에서 내려 명정전에 나아갔다. ‘여민락’(與民樂·세종이 직접 작곡한 정악)을 연주하였다. 도승지 유건기를 비롯한 승자들이 들어와 좌우에 나뉘어 엎드렸다. 상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으로 들어와 절하는 자리에 서게 하고, 인의가 종친과 문무 2품 이상을 나누어 인도하여 동쪽과 서쪽의 편문으로 들어와 절하는 자리에 서게 하였다. 여민락을 연주하고 네 번 절하였다. 음악이 그쳤다.”

영조(조선 제21대 왕·1694~1776년)의 50회 생일을 맞아 열린 오순잔치 ‘어연’(御宴)을 묘사한 승정원일기이다. 

승정원일기는 국보 303호로 조선시대에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국정과 관련된 내용을 일기 형태로 기록한 책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임금이 창경궁 명정전에 들어와 어연을 시작할 때부터 왕세자가 제1작을 올릴 때까지 기록을 보자. 

“사옹원 제조(提調·관아의 일을 감독하는 자)가 술잔을 올릴 때 여민락을 다시 연주하였다. 술잔을 올린 뒤에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제조가 수건이 담긴 함을 받들었다. 여민락을 연주하였다. 내시가 무릎을 꿇고 수건을 올렸다.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음식상을 올렸다. 여민락을 연주하였고 음악이 그쳤다. 정휘량이 화반을 받들었다. 내시가 꽃을 들어 익선관 오른쪽에 꽂았다. 왕세자 이하가 부복(俯伏), 흥(興), 평신(平身·엎드려 절한 뒤에 몸을 그 전대로 폄)을 하였다. 왕세자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정문을 거쳐 술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제조가 술을 담은 첫 번째 잔을 왕세자에게 주었다. 왕세자가 술잔을 받고 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내시가 술잔을 받들어 음식상 위에 놓았다. 왕세자가 동문으로 나와 절하는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치사(致詞·임금에게 올리는 송덕의 글)를 읽은 관원이 왕세자를 대신하여 앞으로 나아가 “왕세자가 삼가 천천세를 축수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세자가 내려와 자리로 돌아갔다. 임금이 잔을 들었다. 여민락을 연주하였다.

◇죄가 가벼운 죄수 석방

이후로 영의정 김재로가 제2작을, 관중추부사 유척기가 제3작을, 금평위 박필성이 제4작을, 밀창군 이직이 제5작을 올렸다. 식은 잠시 쉬었다가 신시(오후 3~5시)에 다시 시작된다. 월성위 김한신이 제6작을, 금성위 박명원이 제7작을 올렸다. 

제7작을 끝으로 식을 마치고 음식을 나누어 주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사면하도록 명하였다. 연회를 끝낸 뒤 임금이 청덕궁으로 돌아와 신하들과 이날 어연에 대하여 마무리를 하였다. 

영조는 식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행사 중간에 개입을 한다. 백관들이 계단 위에서 절을 하는 것은 실례라고 지적하고, 도감 당상을 엄하게 추고하라고 지시했다. 명정전에 군복을 입은 사람이 마음대로 다니는 것을 지적하고 해당 내시를 엄하게 추고하라고 명을 내렸다. 효종의 사위로 당시 92세인 박필성이 제4작을 올리자 영조가 그에게 자손들의 부축을 받아 술잔을 올리라고 지시하고 꽃을 나누어 줄 때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지적하여 시정하라고 하는 내용들도 승정원일기에 상세히 적혀 있다. 승정원 기록 덕분에 조선시대 궁중 잔치를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베푸는 연회로는 회례연, 풍정, 진연 등이 있다. 회례연은 매년 설날이나 동짓날에 임금이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베푸는 연회이다. 풍정은 임금의 탄신을 경축하고 축수할 때 여는 연회이다. 중종 이후에는 시행하지 않고 풍정의 규모를 줄여 간소하게 하는 연회인 진연을 자주 시행했다.

◇흉년 이유로 잔치 거절 

영조가 어연을 열기까지 곡절도 많았다. 이 해 설날 하례식에서 예조판서 정석오가 오순을 맞은 영조에게 진연을 행할 것을 청했다. 정석오는 “숙종도 오순잔치를 열었으니 진연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영조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달픈 상태인데 임금으로서 그들에게 혜택을 준 것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 대신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자신을 보호해준 은혜에 보답하고 축수하기 위해 진연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조는 이후에도 신하들의 요청을 거절했고, 대왕대비를 위한 진연만을 허락했다. 7월에 신하들이 대왕대비에게 진연 실행을 요청했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영조도 진연을 받는다면 자신을 위한 진연도 허락하겠다는 언문교서를 내렸다. 영조는 신하들의 요청과 대왕대비의 권유에 못 이겨 결국 진연을 받겠다고 허락했다.

영조는 ‘진연’이란 명칭도 바꿨다. 자신이 받는 연회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마음을 나누는 자리이므로 연회를 올린다는 ‘진’(進)자 대신에 임금과 함께 한다는 의미로 ‘어’(御)자를 써서 ‘어연’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올리는 술잔의 수도 진연의 아홉 잔에서 일곱 잔으로 줄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조의 탄신일인 9월 13일 묘시(오전 5~7시)에 대왕대비에게 진연을 올리고, 사흘 뒤인 9월 16일 진시(오전 7~9시)에 어연을 거행했다. 이 글의 내용은 ‘후설’(한국고전번역원)에서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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