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역사 한 토막-삼남(三南)의 개성(個性)
[독자기고]역사 한 토막-삼남(三南)의 개성(個性)
  • 관리자
  • 승인 2010.03.12 14:57
  • 호수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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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표 대한노인회 구로지회 구로5동 노인협의회장
삼한시대(三韓時代)

우리나라는 상고시대(기원 1세기) 삼한(三韓)이라는 부족 국가가 있었다. 삼한은 마한(馬韓·호남, 충청, 경기) 진한(辰韓·경상, 강원 일부), 변한(弁韓·가야 일대)으로, 함경도 포함 만주일대는 고구려 땅이다. 삼한국경(三韓國境)을 따라 현재의 각 도의 행정구역이 분리 되었는지도 모른다.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은 지형도 다르고 물산이 다르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의 개성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돈이 갑자기 생기면 쓰는 용도도 다르다고 한다.

충청도 사람은 돈이 생기면 옷을 사 입는다는 말이 있고, 전라도는 음식을 해 먹고, 경상도는 집을 고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의식주에 대한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말이다.

경상도(慶尙道)-오늘날 보면 유서 깊은 고택들이 영남에 주로 보전돼 있다. 어림잡아 전국 고택의 60% 가량은 경상도에 남아 있지 않나 싶다. 경상도가 특별히 돈이 많았던 지역도 아닌데 이처럼 좋은 기와집들이 많이 보전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중(門中)의 결속과 가풍의 보존을 중시하는 퇴계학풍(退溪學風)의 영향도 있었다고 본다. 기호노론의 주기학풍(主氣學風) 보다 영남 남인들의 주리학풍(主理學風)이 상대적으로 집안과 문중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남 남인들이 200년 동안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됐던 것도 집안을 중심으로 내부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전라도(全羅道)-한반도에서 평야가 가장 넒은 데다가 해안가에 갯벌이 많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갯벌은 논밭 다음으로 제3의 농토였다. 육지는 흉년이 들어도 뻘밭은 흉년이 없었다. 갈고리만 하나 들고 뻘밭에 들어가면 굶어죽지는 않았다.

진도(珍島) 같은 섬도 1년 농사를 제대로 지으면 3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나왔다. 그렇다 보니 먹을거리와 절묘하게 결합된 사례다.

충청도(忠淸道)-조선조의 고위벼슬을 많이 배출한 노론의 본거지였으므로 양반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양반은 극단적인 말을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말을 느리게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양반의 체통을 중시하려다 보니 의관(衣冠)을 잘 챙겨 입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면에는 대의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기질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윤봉길 의사, 만해 한용운, 유관순 열사가 모두 충청도 출신이다. 여간해서 내색을 잘 안하지만 속에서는 불꽃처럼 폭발하는 기질의 소유자가 충청도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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