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14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14
  • 관리자
  • 승인 2010.05.26 17:17
  • 호수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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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14)
 자신의 아이들을 낳을 때조차도 황씨는 직접 아이의 첫 울음을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먼저 간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젊은 시절 황씨는 아이와 아내에게 다정다감한 편이 아니었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도 술을 마신 채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고, 결국 첫째는 황씨가 어느 대폿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병원에서 낳은 것을 다음 날 가서볼 수밖에 없었다. 둘째 역시 일하느라 다른 지방에 머무를 때 아내 혼자서 낳아야 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던 황씨의 아내는 늙어서까지 서운한 일이 있을 때면 그때의 일을 끄집어 내곤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씨 뿐 아니라 당시 여유 없이 살았던 시골의 아버지들은 대개가 그랬다. 젊어서는 죽어라 일만 했고, 죽어라 일만 해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미래도 불투명했던 시절.

아이를 처음 봤을 때야 물론 남다른 감회에 젖고,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런 기쁨은 곧 일상에 묻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고통 속에 묻혔다. 가족이 있었지만, 늘 외로웠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부모의 살뜰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부모가 됐어도 가족과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됐건 아이들 역시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했을 것이었으므로 그 점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크건 작건 느끼는 감정이었다. 억울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풀어지면 가족의 생계는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운 살얼음판 같은 사회 속에서 지금과 같이 가족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반대로는 아쉬움이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자녀들과 아내에게 좀 더 다정한 아버지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들곤 했던 것이다. 지난 1년 여간 정말 놀라운 변화의 시간을 겪었던 황씨였다. 서른 살이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아잉을 맞이하고, 갓난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은 자신이 미처 가져보지 못했던 현대식 가정의 알콩달콩한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신이 배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신생아실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었고, 남은 인생이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와 아잉을 데리고 가정을 새로 일구는 기분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예전이야 사람 나이 70이면 장수했다고 한다지만, 요즘에야 어디 그런가. 90이 넘도록 정정한 사람도 있을뿐더러, 지금으로도 100세 나이가 큰 화제가 안 되는 세상이니, 황씨가 앞으로 30년 후까지 살아 남는다고 한다면 100세도 보편적인 나이가 될 것이다. 예전의 의식에 사로잡혀서 이미 나이 70에 세상 다 산 것처럼 살아가는 노인네들이 많지만, 황씨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젊은 아내와 아이까지 생겼다. 인생, 까짓 거 한 번 더 살아보는 것이다. 열심히 운동도 하고, 술도 적당히 먹고, 사람들에게 책 잡힐 행동이나 말조심하고 살아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황씨가 아이를 보고 오후 늦은 햇살을 받으며 농장으로 돌아오자 농장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황씨는 그들에게 한월의 건강한 탄생을 알렸다.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아낙도 있었다. 아낙들은 황씨를 집 뒤편의 농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농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황씨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트남 작물들을 모두 수확해 비어 있던 농장이 온갖 자재가 가득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유복이 바쁘게 옮겨 다니며 자재 차량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밭에는 벌써 반나마 하얗게 색까지 칠해진 울타리가 둘러쳐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한월농장’이라고 쓴 큰 간판까지 달려있었다. 한국에서 10여년 살면서 철공과 목공, 공사판 일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던 유복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황씨는 유복을 잡아 세웠다. “아니 이것들이 다 뭐여.” “황 아저씨와 우리 농장이지 뭐겠어요?” “돈들은 다 어디서 난겨?” “그동안 우리한테 준 월급들 그거 우리 다 모아갖고 있었지요.” 황씨는 갑자기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터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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