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 관리자
  • 승인 2010.07.09 11:30
  • 호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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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품에 잠들었으면(2)
처음에는 이야기가 잘 풀렸다. 이여사도 몇 번 산행에 장씨를 본 적이 있노라고 말한 걸로 봐 장씨가 눈에 들어왔던 듯 싶었다. 사실은 전에부터 장씨가 이여사를 눈여겨 봐 왔기에 산행을 할 때면 일부러 이여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속도를 조절했으니,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평일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그리 흔하던가. 술 두어 잔에 분위기는 쉽게 풀어지고 어색함은 금세 날아갔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이렇듯 쉽게 친해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장씨는 이여사를 본 후부터 산행에 부쩍 재미를 붙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금을 들여 산 등산화며 조끼, 장갑도 수컷의 자기과시와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어렵사리 말을 붙여 같이 저녁까지 먹게 됐다. 산행 끝에 먹는 술은 금세 오른다. 막걸리 두어 잔에 벌써 이여사도, 장씨도 불콰해졌다.

간간히 높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장씨는 분위기를 최대한 유쾌하게 유지하기 위해 때론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을 만나는 데 최고의 무기는 유쾌함이다.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히 이여사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젊어서 혼자 된 후 시장에서 한복집을 하다가 이젠 혼자 된 딸아이에게 물려주고 간간히 바쁠 때나 일을 거들어 준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엄마와 딸이 쌍과부가 됐다고 말하는 이여사의 말 끝에는 살짝 우수가 묻어 있었다.

“어쩐 지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옷을 짓는 일을 하셨군요. 예로부터 옷을 짓는 여자는 심성이 곱다고 그랬죠. 눈썰미도 남다르실테고.”

장씨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렇지. 사람이 몸에서 풍기는 기품이란 게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지.

“저도 혼자올시다. 학교 행정을 보다가 지금은 퇴직하고 그저 이렇게 산에나 다니고 있지요. 뭐, 이여사가 더 잘 아시겠지만, 젊어 아내를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은 아닙디다. 한창 엄마가 필요할 때 어미를 잃었으니, 그저 큰 탈 없이 자라준 아이들이 대견할 뿐입니다.”

학교 소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장씨였으나, 이여사 앞에서 ‘소사’란 말을 쓰긴 싫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사도 학교 행정업무 아니던가.

어찌됐든, 겉으로 보기에는 한복집 여주인과 교육계에 몸담은 노신사의 만남이었으니, ‘평균레벨’ 이상은 될 터다. 부러 고상한 말투에 경박스럽게 보이지 않고자 말수도 아꼈다.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도 ‘허허…, 호호….’

그런데 그만 어쩌다 보니 불콰해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는지, 경박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었다.

산행의 노곤함이 초저녁부터 과한 막걸리를 만났으니, 기분이 헤까닥 뒤집혔던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온천을 다니면서 또래 마나님들하고 어울려 여관방에서 화투판을 벌이던 일을 생각하고는 그만 이여사에게 근처 조용한 방을 잡고 얘기나 더 하다 가자고 말을 붙이고 만 것이었다.

진정코 장씨는 이여사를 엎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루다, 진정코 진심으루다 왁자지껄한 선술집을 벗어나 조용하고 깨끗한 둘만의 방 안에서 조용하고 오붓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술김에 품었던 그 환상은 제 정신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뺨맞을 말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날마다 돌아다니는 북한산 다람쥐들을 꼬시려거든 얼마든지 있었다. 낙타부대, 박카스 아줌마, 돗자리 아줌마 등 수많은 별명으로 불리는 그들한테 그저 몇 푼 쥐어주면 그까짓 욕정 채워주는 것이야 뭐 대수였겠는가.

그러나 몸이 달아올라 어쩔 수 없이 장사를 하고 나면 몰려드는 허무함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어떤 할망구는 일껏 올라타 열심히 낑낑대고 있는 장씨에게 보란 듯이 껌을 짝짝 씹어대질 않나, 허공을 바라보면서 무미건조하게 나무토막같이 누워만 있는 대상에게 껄떡대는 자신을 보면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줌마라도 찾아 자신의 욕구를 발산해야만 하는 처지가 참으로 가련했다. 수컷에게 이런 욕구를 부여한 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대상이 아니라 장씨는 단 한번 품에 품더라도 제대로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을 원했다. 아니, 꼭 살을 섞지 않아도 좋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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