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9)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9)
  • 관리자
  • 승인 2010.09.03 11:55
  • 호수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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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가 보기에 최씨의 상황은 대략 알만했다. 젊은 시절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회사에 충성했다. 가족들은 그 덕에 편안하게 공부하고 생활해 왔지만, 정작 그렇게 온 힘으로 살아온 젊은 날은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이제 은퇴한 뒷방 늙은이일 뿐이라는 뻔한 푸념.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젊은 시절 일에만 매달려 사느라 가족에게는 소홀했던 가장이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었다. 일하는 시간 외에 다른데 한눈 판 적도 없었건만, 아이들은 아버지가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여서 자신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고 기억하기 일쑤였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가족의 일은 나 몰라라 했던 전혀 가정적이지 못한 남편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최씨는 주말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날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사회 속에서 도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IMF의 어려운 시기에도 최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런 최씨의 자세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런 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뉴스 속에서 나오는 명퇴자니, 어려운 집안의 얘기는 남의 일일 뿐이었다. 항상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에게 서운해도 그냥 ‘허허’ 거리며 넘어간 최씨의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이 구차스러웠을 뿐 아니라, 일에 지쳐 녹초가 되다보면, 그만 집에 와서 있는 몇 시간만이라도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비워놓고만 싶었다. 그런 최씨에게 가장 편한 쉼터가 있었다면 종로에 있던 음악다방이었다.

20여 년 전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한 겨울 몸이나 잠깐 녹이겠다고 들어갔던 종로의 한 음악다방에서 유씨를 처음 만났었다. 쌍화차를 한잔 시켜 몸을 녹이다가 갑자기 따뜻해진 훈기 때문이었을까,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린 최씨는 내내 세 시간이 넘게 잠을 잤다.

불편한 소파에서 그 긴 시간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유씨의 살가운 배려 덕분이었다. 소파 한 귀퉁이에 목 베개를 받쳐주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준 유씨의 배려로 정말 단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잠이 깬 최씨는 미안하고 또 염치가 없어 거듭 사과를 했지만, 유씨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유씨의 편안한 미소와 아무 것도 묻지 않는 태도는 단박에 최씨를 사로잡았고, 그 후 시간만 나면 종로의 유씨 다방을 찾았던 것이다.

최씨가 다방을 찾는다고 해도 별다른 스캔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잠시라도 다방에 들르면 비로소 ‘쉴’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항상 업무에 치이고, 집에서는 끄떡없이 회사를 잘 다니는 능력 있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느라 하루 온종일 경직돼 있던 몸이 이곳에만 오면 노골노골하게 풀어졌다.

유씨는, 최씨가 그 날은 어떤 일을 했는지, 기분이 어떤지, 자신은 어떠했는지 전혀 묻거나 재잘대지 않았다. 집에만 돌아가면 하루 종일 그날 있었던 억울함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가족들에게 지칠 대로 지쳤던 상황과는 완전히 달랐다.

다만 피곤하면 피곤을 풀 수 있도록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고 다방의 온도를 맞춰 주었고, 가끔씩 최씨가 맥주잔이라도 기울일 때는 옆에서 보조나 맞춰 한두 잔 기울일 정도였다. 나름 접대도 해 보았고, 받을 만큼 받아도 본 최씨였지만, 유씨에 대해서는 화류계 여성을 만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최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공간을 찾았다. 유씨의 다방과 유씨는 어느덧 최씨 일상에서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 됐다.

그런데,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사건’이라고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바람을 핀다고 최씨의 아내가 드잡이를 한 것도 아니요, 갑작스럽게 누가 아프거나 죽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종로의 유씨 다방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한 1년이나 드나들었을 때였던가,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지던 유씨는 어느 날 말도 없이 가게를 정리하고 사라져 버렸다. 인적사항은 물론, 유씨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최씨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됐다.

사방을 통해 유씨의 행적을 찾았으나 홀연히 사라진 유씨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부동산 업자의 말을 통해 유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 다방 아줌마 참 사람 좋았는데, 아마 여기 종로 임대료가 올라가니 감당을 못해 버티다 못해 사채를 끌어다 썼나 봅니다…. 진즉에 다방 정리했어야지요. 요즘 세상에 누가 다방에 온답니까? 땅값이 오르니 임대료는 오르지, 손님은 줄지. 어떻게 버티겠어요. 수지타산 생각했다면 벌써 몇 해 전에 정리 했어야 하는데, 그 아주머니 다방이 좋아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는데 어떻게 문을 닫느냐며 끝까지 버티더라구요.”

최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은행 지점장이란 것도 알았던 유씨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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