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喜壽)에 첫 주례를 서다
희수(喜壽)에 첫 주례를 서다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1.03.28 16:02
  • 호수 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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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 용인 기흥구구갈동 분회장

결혼을 주관하는 주례는, 존경하는 스승이나 저명인사가 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정의 시작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증인이 되는 사람으로 성혼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 사는 친구가 주례를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 존경하는 스승도, 저명인사도 아니고, 주례 경험도 없는 나에게 이 같은 부탁을 하는 친구의 처지를 생각해 덜컥 승낙부터 했다.

그 친구와 나는, 한마을에서 자라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의 모든 추억을 공유하는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초등학교 때는 몸이 불편했던 친구를 매일 업어서 집에다 데려다주기도 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온갖 고생을 같이 겪으며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한 오랜 벗이기도 하다.

황혼의 인생길을 함께 걸으며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에게 자신의 귀한 막내 아들의 주례를 부탁하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여든의 나이에 38살 외아들을 장가보내는 경사스러운 날, 친구가 날 주례로 떠올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서는 주례가 마냥 설레는 것은 아니었다. 주례의 작은 실수가 성스러운 결혼식을 망칠 수 있다는 부담감마저 들었다. 주례를 서겠다고 답변을 한 후, 매일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했다. 주례사도 수 십번씩 고쳐가며 완성했다. 주례사에는 만남의 책임감을 비롯해 결혼과 가정의 의미, 인격체로서의 부부생활 등을 담았다. 길어야 10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주례사이지만 80년을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느낀 많은 교훈들을 담기 위해 애썼다.

예식 당일, 50년 전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던 그 때만큼 가슴이 쿵쾅거렸다. 양가 어머니의 촛불점화를 시작으로 신랑신부 행진까지 모든 식을 무사히 마쳤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그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식장에는 신랑신부를 축하하기 위한 손님이 아니라 주례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있었다.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들 10여명이 서울까지 찾아온 것이다. 여든을 넘긴 친구들이 서울, 경기를 비롯해 멀리 부산과 광주에서도 왔다. 친구 아들의 결혼과 늦깎이 주례를 선 것을 핑계로 오랜만에 동창모임을 갖게 됐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둘러 앉아 옛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술잔도 오고가고, 정담도 함께 오고간다.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 이야기가 쏟아진다. 숨겨뒀던 비밀 이야기도 나온다. 모두 60년 전의 이야기들이다.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고향의 정취가 모두를 하나로 이어줬다.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노래방까지 찾아갔다. 아리랑을 비롯해 온갖 타령, ‘타향살이’ ‘목포에 눈물’ 등 흘러간 옛 노래들이 줄을 잇는다. 구성지게 노래 가락을 뽑아내는 친구도 있고, 음정 박자 모두 무시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녀석도 있다. 모두가 흥에 겨워 어깨 춤을 훈다. 어릴 적 회관 앞마당에서 벌였던 놀이마당이 노래방에서 재연됐다.

멀리 부산과 광주에서 올라 온 친구들을 보내기 위해 아쉽지만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전철역에서 서로 악수하며 ‘잘 가라’ ‘건강해라’ 인사를 건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지금 헤어지면 황혼을 함께 걷는 소중한 친구들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희수(喜壽)에 첫 주례를 서는 날. 그날은 친구의 외아들을 장가보냈던 경사스런 혼사 날인 동시에, 고향 친구들과 향수에 젖었던 추억이 담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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