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페스트푸드점 ‘점령’한 어르신들… “젊어지고 싶다”
카페·페스트푸드점 ‘점령’한 어르신들… “젊어지고 싶다”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1.05.13 15:02
  • 호수 2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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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오후 1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부근 한 커피 전문점. 회사원이나 젊은이들이 즐겨 찾을 것 같은 곳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열댓 명의 노신사·숙녀가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도넛과 ‘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일부 어르신들은 홀로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가 하면,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교복 입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이 다소 이색적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서로의 세대차를 전혀 의식하지 않아 자연스런 분위기가 흘렀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패스트푸드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몰려든 젊은 학생들과 직장인들 사이로 백발의 노인들이 듬성듬성 앉아 햄버거를 먹는다. 한손에는 햄버거, 한 손에는 콜라를 들고 대화하는 모습도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커피 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으로 어르신들이 이동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도심 카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안종호 기자 / 사진=임근재 기자
▲ ▲서울 종로에 위치한 ‘롯데리아’. 저렴한 가격으로 점심메뉴와 커피 등을 즐길 수 있어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어르신들의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장시간 이용

노인들이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시간 이용할 수 있는데다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지역에서 어르신들이 자주 찾는 종로와 인사동, 동대문 일대는 교통이 편리한데다 곳곳에 ‘스타벅스’나 ‘롯데리아’ ‘맥도널드’ ‘던킨도너츠’와 같은 유명 커피전문점 및 패스트푸드점들이 즐비하다. 젊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출근시간대와 점심시간대를 피하면 실내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6개월 전부터 ‘스타벅스’를 즐겨 찾고 있다는 이태준(72) 어르신은 “장기두면서 싸우고 술판이나 벌이는 번잡한 공원보다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가 훨씬 낫다”며 “커피 한잔만 시키면 시간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비치된 책도 맘껏 읽을 수 있으니 1석3조”라고 커피전문점 예찬론을 폈다.

박모(68) 어르신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커피를 마시는 게 처음엔 어색했지만 최근에 나 같은 노인들이 부쩍 늘어나 부담이 덜하다”며 “집에 있으면 자식들 눈치를 봐야하는데 여기서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스타벅스’와 같은 외국계 커피전문점의 경우 값이 비싸다는 인식이 있지만 일부 저렴한 커피 메뉴의 경우 2000원에 판매하는 곳도 있다. 무엇보다 도심 카페는 일반 다방이나 음식점과 같이 주문한 음료나 음식을 다 먹은 뒤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오모(74) 어르신은 “다방이나 막걸리 집에만 가도 뭐든 먹어야 하고, 먹은 후에는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지만 여기는 당장 뭔가를 시키라는 소리도 없고,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찾게 된다”고 말했다.

▲저렴한 점심메뉴로 식사도 해결

서울 종로나 인사동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 패스트푸드점을 가도 햄버거 먹는 노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노인들의 입맛이 바뀐 것은 아니다. 최근 물가 상승의 여파로 점심시간에 값비싼 일반 식당 대신 패스트푸드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는 것. 이들 매장의 점심 메뉴는 보통 때보다 20~30% 할인 판매하기 때문에 어르신들도 선호한다.

인사동 ‘롯데리아’에서 만난 김현복(69) 어르신은 “근처에 무료 급식소가 있지만 길게 줄을 서야 하고 일반 식당은 가격이 비싸 엄두가 나질 않는다”며 “종로에 나오는 날이면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차분히 커피까지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고 설명했다.

종로에 위치한 ‘맥도널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장 곳곳에 햄버거나 감자튀김ㆍ커피를 시켜놓고 혼자 또는 일행들과 함께 점심을 해결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매장 직원은 “주변에 탑골공원ㆍ종묘공원이 위치한 영향도 있겠지만 점심 때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며 “가격 부담 때문인지 주로 런치세트나 감자튀김ㆍ콜라ㆍ커피 등 단품 위주로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맥도널드의 경우 인기 상품인 ‘빅맥세트’와 ‘불고기버거세트’는 평상시 각각 5000원, 4300원이다. 그러나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적용되는 ‘런치타임’에는 각각 3900원, 3200원으로 할인 판매된다. 인근 식당 음식가격이 6000~7000원인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정도 저렴하다. 이 때문에 어르신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안모(73) 어르신은 “노인복지관에 가면 무료 또는 저렴한 가격에 점심을 먹을 수 있지만 몇 시간 전부터 식권을 받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는 게 번거롭다”며 “게다가 배식이 특정장소에서 이뤄지다 보니 인근에 거주하는 노인이 아니면 이용이 불편해 패스트푸드점이 낫다”고 말했다.

▲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부근에 위치한 ‘스타벅스’. 점심 식사 후 커피전문점을 찾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젊은이들과 함께 커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젊다는 사실 확인하고 싶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커피전문점과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데는 경제적, 심리적 요인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과 어울려 활기차고 젊게 살고 싶다거나 뒤늦게 커피 맛에 심취한 어르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문화시설이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도 지적할 수 있다. 노인을 위한 여가 및 문화시설은 한정돼 있고, 주변 환경이나 시설이 몹시 열악한 수준이다. 실버영화관이나 노인복지관도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지만 스스로 나이든 것을 인정하게 되는 ‘노인전용’을 꺼리는 심리적 요인도 한몫한다.

집 근처 복지관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뒤 커피 맛에 푹 빠졌다는 김대철(70) 어르신은 점심값을 조금씩 아껴 일부러 커피전문점을 찾는다.

그는 “회사 다닐 땐 식후에 마셨던 다방커피나 자판기 커피 밖에 몰랐다”며 “요즘은 아메리카노나 카페모카, 아라비카, 슈프리모 등 원두커피를 즐겨 마신다”고 말했다.

이어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뒤 손자·손녀들이 놀러오면 손수 커피를 만들어 준다”며 “커피를 소재로 손자·손녀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도 주고받게 됐다”고 밝은 미소를 짓는다.

김 어르신은 “자신처럼 원두커피를 즐기기 위해 커피숍을 찾는 노인들도 생각보다 많다”고 귀뜸했다.

서울시청 부근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있던 권모(71·여) 어르신은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집에 있자니 눈치는 보이고…. 차라리 이렇게 밖에 나와서 나름대로 문화생활을 즐기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공간을 이용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며 “노인들이 갈 수 있는 마땅한 여가문화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게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종각역 주변의 한 커피 전문점 직원은 “젊은 손님들이 몰리는 점심시간이 지나면 테이블의 절반 이상이 어르신들로 채워진다”며 “젊은이들과 달리 문화 공간이 많지 않고 다방도 사라지면서 몰려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사실 이곳에 오는 노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며 “탑골공원 등에 모이는 어르신들과는 스스로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탑골공원 인근 ‘맥도널드’에서 만난 김정수(67) 어르신은 “복지관에는 여성들만 가득하고, 경로당에서는 일흔 살도 담배 심부름을 해야 하는 막내”라며 “마음 편히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스스로 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라 느껴져 패스트푸드점을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박모(69) 어르신은 “도시가 훤히 보이고 쾌적한 곳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며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은 노인들이 찾는다는 인식이 강해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춘자(63·여)씨는 “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지만 마음만큼은 아직 이팔청춘”이라며 “젊은이들이 많은 커피전문점에 오면 함께 젊어지는 느낌을 받아서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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