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버스 안 노약자석
'유명무실'한 버스 안 노약자석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1.05.23 16:43
  • 호수 2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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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 용인 기흥구구갈동분회장

서울 나들이를 갈 때면 무임승차가 가능한 지하철 대신 직행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지하철의 검은 벽이 아니라 차창 밖에 펼쳐진 따뜻한 봄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전용차선을 이용하기에 빠르고 편리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용인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출퇴근 시간대가 지나도 강변과 강남일대 시내로 향하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거기에 용인 주변에 위치한 대학교 학생들도 한 몫 거든다. 버스를 타면 그래서 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 일쑤다. 그럴 때면 60, 70년대 버스 안내양이 승객을 밀어 올리고 차 문을 까까스로 닫으며 ‘오라이’ 하고 외치던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버스에 올라타도 앉아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서서 가기 마련이다. 서서 가는 게 때로는 운동도 되고 좋을 때가 있다. 손잡이를 양손에 꼭 잡고 차의 요동에 균형을 맞추며 운동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무릎이나 관절이 안 좋은 날이다. 그 때는 버스 앞좌석에 노란 색으로 표시된 ‘노약자석’이란 글자가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다섯 좌석이 노약자 배려석으로 배치돼 있다. 그러나 정작 노인들이 그 자리를 이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루하루 나이가 들수록 이 표어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노약자 보호석’은 왜 만들어 놨을까. 행정 당국에서 운행 허가를 할 때 전철과 같이 ‘노약자석’을 만들도록 의무화 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업을 하는 버스회사에서 노약자를 배려한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버스에 있는 ‘노약자석’은 이름만 있을 뿐 유명무실한 제도다. 어쩌다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가 한 둘이 있을 뿐이다. 건강이 정말 몸이 무겁고 힘들 때는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대개 3~40대, 아니면 20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은 스마트 폰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다. ‘노약자석’에 앉아 미안한 생각을 하기 보다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당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노약자석’을 양보하는 젊은이가 있을 때는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처다 보게 된다.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젊은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노약자에게 노약자석을 양보하는 일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전철에서는 ‘노약자석‘에 노약자 아닌 사람이 이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좁은 버스의 특수성 때문인지 궁금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버스 안의 노약자석은 왜 만들었으며 이것은 왜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 혼잡한 버스 내의 상황도 그렇지만 생업을 마친 사람들의 심리도 작용한 듯 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젊은이들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도리다. 차라리 운전사가 방송으로 ‘노약자석’ 자리양보를 방송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명패만 붙여 놓고 유명무실한 ‘노약자석’이라면 차라리 제거하는 것이 승객 모두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노인들은, 자식을 키우고 가리키며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한결 같다. 생업에 시달리고 공부에 열중하며 피곤해 지친 젊은이들을 위해 오히려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늙고 힘없어 불편하기에 노약자석에 앉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며 양보 하는 자세를 가질 때, 그들도 노약자가 됐을 때 대접받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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