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의 화려한 외출
[기고]나의 화려한 외출
  • 관리자
  • 승인 2011.06.24 14:22
  • 호수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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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용 일성여자고등학교 2-2반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자녀들의 학업을 모두 마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인연을 맺게 된 일성학교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회이자 전환점이 됐다.

학교에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늦깎이’ 여중생, 여고생들이 있다. 적게는 40세에서 많게는 70세까지 그 연령도 다양하다. 남들보다 늦게 꿈을 펼치는 만큼 학업에 대한 열정은 수험생 못지 않다. 자다가도 영어와 한자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오전 9시 등교시간이 되면 가방을 멘 ‘엄마’들이 종종 걸음으로 교문에 들어선다. 손에 든 수첩에는 영어 문장·사자성어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눈에서 빛이 난다. 일성여중고는 가난과 결혼 등의 이유로 학업을 접어야 했던 중년층 이상 주부들이 다니는 학력인증 학교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각각 2년제로 운영된다.

일성여자고등학교의 학구열은 남다르다.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어려운 시절의 한이 가슴에 남아있는지 공부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와 혀를 굴려가며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영어 암송을 할 때면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여러번. 하지만 친절한 영어 선생님의 지도로 100회에 가까운 암송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영어가 재밌어지고, 자심감도 생겨났다.

그렇게 영어에 흥미를 느낄 무렵, 매년 개최하는 팝송 경연대회가 뇌리를 스쳤다. 노래를 정하고 연습하는 내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팝송을 흥얼거리며 연습했다. 3년 전 중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만해도 영어 노래는 커녕 A, B, C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나였기에 가족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일성여고 2학년 2반 대표로 4명이 선발됐고, 그 중에서 필자가 56세로 맞언니 역할을 담당했다. 최연소 참가자였던 18세 이수민과의 나이 차이는 무려 38살. 하지만 우리 팀은 나이도 잊은 채 혼연일체가 돼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했다.

쉬는 시간이면 교실, 다목적실, 화장실을 가리지 않고 노래연습을 했고, 방과 후에는 노래방으로 장소를 옮겨 실전연습도 했다. 무대 의상도 학급 친구들과 함께 직접 제작했다. 그렇게 6월 한 달 동안 즐거운 팝송연습은 계속 됐고, 그 결과 언제 어디서고 자신있게 부를 수 있는 팝 애창곡을 완성했다.

5월 30일 치열한 예선을 거쳐, 중고등부 총 16팀이 선정됐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3일,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성여중고 팝송경연대회가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우리 반은 10번 째 순서였다. 무대에서 어떻게 노래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같은 반 친구들의 열띤 응원의 목소리만 귓가에서 맴돌았다. 행여나 실수할까 조마조마 했지만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만족스런 무대였다.

팝송 경연대회 참가는 내 일생의 가장 놀라운 사건이자 화려한 외출이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았던 대상까지 수상하면서 기쁨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응원하기 위해 찾아 온 언니와 형부를 보자 벅찬 마음에 눈물이 눈, 코, 입을 통해서 마구 쏟아졌다. 가슴 벅차고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을 평생 언제 한번 다시 흘릴 수 있을까.

만학도 여고생의 진짜 학창시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곧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때문이다.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면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계층을 돕는 곳에서 인생에 주어진 또 다른 기회를 가치있게 사용하고 싶다.

이렇게 부푼 꿈을 꾸고, 가슴 벅찬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이선재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영어 선생님, 음악선생님,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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