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임진(壬辰)년의 교훈을 마음에 되새기자
[기고] 임진(壬辰)년의 교훈을 마음에 되새기자
  • 관리자
  • 승인 2012.03.02 14:10
  • 호수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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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필 한국고령자정보화교육협의회 서울원로방 회장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이 되는 임진년이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15만8000 대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파죽지세로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고, 임금 선조는 의주 국경까지 도망쳤다. 전 국토가 무참히 유린된 7년 전란은 참혹한 상흔을 우리 민족에게 각인시켰다. 30년 전 일본 오사카 성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는 일본 군대의 모습을 그린 ‘조선출병도’를 전시실에서 보고 몸서리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도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반일(反日) 감정을 심어준 원인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역사를 고증했던 자료를 보면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 국력의 차이는 엄청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부터 일본은 수천 정의 조총을 가진 최신식 철포 부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1543년 포르투갈인이 전해준 화승총을 개량해 조총을 개발했으며, 사격거리는 109m에 달했다. 당시 인구도 큰 차이를 보였다. 조선이 500만명, 일본이 2200만명으로 열세였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과 일본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공리공론만 탐닉하며 사화(士禍)나 일삼았다. 그것도 모자라 무능한 선조 밑에서 패가 갈린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악랄한 싸움을 벌였다. 이것은 단순한 양비론이 아니었다. 일본에 파견했던 통신사의 보고는 정반대였다.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전쟁에 대비하자”는 서인 측 주장에 “그런 정황이 없는데 왜 민심을 동요시키느냐?”고 전쟁준비를 등한시 한 집권파 동인 패거리들을 보면 지난 선거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며 평화가 아닌 염전(厭戰)심리를 부추겨 표를 구걸한 정당이 떠오른다.

‘당장 편한 게 좋다’고 착각한 조정은 많은 일선 지방 관리들의 장계(狀啓)를 무시하고 전비를 게을리 한 결과, 임진왜란의 참극을 자초했던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이순신, 권율, 김시민, 신립, 송상헌, 정발 등 용감한 장군과 700의총으로 상징되는 많은 국민들이 의병으로 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자력 수행이 불가능해 명의 원군을 받으며 7년간 싸워야했다.

1589년 대마도 주였던 ‘소 요시도시’(宗義智)가 사절로 조선을 방문해 임금에게 조총을 진상했지만 그 우수한 성능을 파악해 실전에 배치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은 1587년 26척의 배에 인원을 싣고 남해안에서 정탐활동까지 벌였다. 전쟁 발발 후 동인의 영수 유성룡 같은 중신이 서인이었던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배척한 것을 통탄했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왜군과 맞서 정규군으로, 의병으로 싸워야했고 수십만 명의 왜군과 명나라 군인들이 몇 년간 북새질치는 동안 그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던 민중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왜군에게 능욕당해 아이를 잉태한 여승과 여인들을 거주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이태원(異胎院, 梨泰院)은 너무나 슬픈 무형의 전적지다. 수만 명에 이르는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가 전리품으로 잘려 일본에 보내졌고 수많은 조선 인질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노예로 팔려갔다.

역사는 300여년 뒤 냉정하게 반복됐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했을 때 그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요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불나비처럼 정권 쟁취를 향해 뛰어드는 정치인들은 임진왜란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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