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신나는 노년
[금요칼럼] 신나는 노년
  • 관리자
  • 승인 2012.06.15 14:57
  • 호수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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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20여년 전 영국 켄트지방의 곡창지대 들판에 밀이 짓눌려 있는 직경 수십 미터의 크고 작은 원형들이 발견됐다. 이 원형들은 전날 들판에서 일했던 농부들이 본 적이 없는 것이라 밤중에 생긴 게 분명했다. 주변엔 발자국 등 어떤 흔적도 없었고 원형 자체도 기하학적으로 완벽해 마치 거대한 원형물체가 내려앉았다가 뜬 자리 같았다. 동네 주민들에서부터 외계의 비행접시가 다녀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원형들은 밀이 시계방향으로 일정하게 눌려있고, 그 자국이 아주 정교했기 때문에 UFO(미확인비행물체) 연구가들을 들뜨게 했다. UFO 착륙 흔적에 관한 소문이 확대되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몰려들었고 연구논문도 발표됐다. 과학자들은 그럴듯한 물리이론을 인용해 이 원형들이 분명 UFO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흥분했다. 매스컴도 이 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외계인들이 지구를 넘본다는 설명과 함께 그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된 이와 비슷한 원형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미스터리 원형들은 한 신문기자의 끈질긴 취재 끝에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두 노인의 장난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켄트 지방에 살고 있었던 촐리(62)와 바우어(67)라는 노인은 노년기의 무료한 생활을 떨치고 뭔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일을 찾던 중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UFO 소문에 착안해 이 같은 일을 꾸몄다.

이들은 영국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30여개의 원형들도 자신들의 ‘작품’임을 자백했다. 하루 밤 사이에 이 거대한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 날 때마다 밤잠을 자지 않고 들판에 나와 맹연습을 했다. 점점 완성도를 높여가다 드디어 이 작품이 세계의 이목을 받아 떠들썩하게 되자 이 두 노인은 자신들이 꾸민 오랫동안의 ‘음모’가 성공했음을 알고 태어나서 최고로 마음껏 웃었다고 한다.
이들의 작품은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모방됐다. 넓은 밀밭이 있는 미국, 캐나다, 호주, 체코 등에 대규모의 기학학적 무늬가 그려졌다. 고대인이 그렸음직한 문양에서부터 초현대식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양의 ‘미술품’이 제작됐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인터넷에서 crop circle을 치면 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제 그 두 노인은 미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주인공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노인들은 그 많은 남는 시간을 무엇으로 소일하는가? 바람직한 생산적 활동으로 손자녀 돌보기, 학습, 자원봉사 등이 추천된다. 물론 아직까지 하루 6-7시간씩 TV 앞에 앉아있거나,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경로당이나 공원에서 화투나 잡담으로 지루하게 하루를 보내는 노인들도 많이 있다.

우리 주변에 자신은 아직 일할 능력과 의지가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많이 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당신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도전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였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노년기에 설렘과 가슴 벅참, 그리고 전율이 일어날 만큼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자신을 내어던지는 일은 불가능한가?

노인은 사회적으로 부정적 이미지의 대상이며, 이에 대해 노인조차 자신을 부정적인 자기충족적 예언의 희생자로 만든다. 노인 자신도 자기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해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자타가 공히 노인은 창의력과 생산성이 결핍돼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시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맡기지도 않고 자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노익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이 70 혹은 80에 인류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업적을 만든 사람들이 많이 있다. 노인의 지능은 항상 나이에 비례해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지능의 어떤 영역은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높아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점잖은 노인, 권위 있는 노인에 익숙해왔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이 잘 웃고, 활발하고, 자유로운 감정표현을 하며, 장난기 있는 노인을 경원시해왔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마음은 성인과 노인이 돼도 사라지지 않고 잠재돼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마음이 적절하게 발휘돼야 건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성격심리학자로서 교류분석이론을 창안한 에릭 번은 이러한 성격특성을 자유로운 어린아이 자아(Free Child Ego)라고 명명했다.

노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중에 “노인이 되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을 “노인이 되면 어린아이처럼 되자”라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노인이 항상 가족이나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하찮은 것에서 희열을 느끼고, 그동안 무심히 넘겼던 인간과 우주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그리고 잠재돼있는 창의력을 개발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 일에 열중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면, 이는 정말 신나는 노년이 아닌가? 비록 신체적으로는 쇠퇴해도 노인의 여생이 감사, 감격, 재미, 베풂, 유쾌함으로 가득하게 된다면 노년기는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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