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여성 독립운동가⑥ 박차정(朴次貞, 1910.5.7~1944. 5.27)
시로 읽는 여성 독립운동가⑥ 박차정(朴次貞, 1910.5.7~1944. 5.27)
  • 관리자
  • 승인 2012.06.29 11:34
  • 호수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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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설=시인 이윤옥

부산이 낳은 대륙의 들꽃, 박차정

흙 담장 위로 호박순이 소리 없이 기어오르고
하늘은 비를 뿌릴 듯 먹구름 드리웠다
님이 계실 일 없겠지만
동래 칠산동 생가 텅 빈 기와집 안채 뜨락엔
어디선가 때 이른 흰나비 한 마리 날고 있다

님도 나비 되어 고향 땅 찾았을까
툇마루 걸터앉은 나그네 곤륜산 하늘을 더듬는다

부산의 조숙한 문학소녀
경술국치 치욕의 날 자결한 아버지 뒤를 이어
타오르던 항일 투지 끝내 의열단 투신했었지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사랑하는
조선의 피 끓는 혁명가와 맺은 언약
신방에 타오르는 촛불 우국의 횃불 삼아
대륙을 휘저으며 일제에 대적하던 여장부

곤륜산 피 튀는 전투에서 마감한 서른네 해 삶
왜적의 총칼에 날개 꺾였으나
나라사랑 마음 생사 따라 변하지 않아

조국의 빛 찾던 날 피 묻은 속적삼 가슴에 품고
고향 땅 돌아온 남편 슬픔 삭일 때
긴 가뭄 끝 밀양 감전동 하늘에 때맞춰 내리던 단비
대지에 피처럼 스며들던 불굴의 투지여라.



박차정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부모와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 숙부 박일형 등의 영향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일신여학교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해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했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한 이래 박차정은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여성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했다. 당시 근우회는 학생운동에도 관여해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박차정은 시위 직후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석방 후 고문 후유증 치료를 받던 중 중국에 먼저 건너가 의열단에서 활약하던 둘째 오빠의 주선으로 북경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했으며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했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개설을 준비했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 때 22명으로 구성된 대본부 부녀복무단장으로 선출됐다. 박차정이 많은 여성독립가 중에서 부녀 복무단 단장으로 선출된 것은 탁월한 지도력과 따스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 대원 가운데는 여자 대원이 많이 있었는데 박차정은 자상한 언니처럼 대원들을 보살펴 줬다. 여성 대원들은 감자밭을 일구거나 도토리를 주워 가루로 만들어 대원들의 식량 조달에도 힘썼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이 낫지 않고 후유증이 도져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34살의 아까운 나이로 중경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됐다. 부산 금정구에 동상(2001년 3월)이 세워져 있고, 동래구 칠산동에 생가가 복원됐다(2005년 7월).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 엿보기] 일본순사도 무서워 벌벌 떨던 의열단장 남편 김원봉
김원봉(金元鳳,1898.8.13∼1958.11.)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위키백과사전에는 ‘김원봉’에 대한 첫 줄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자발적인 월북자라는 이유로 제1공화국이 붕괴한 뒤에도 금기시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연안파가 숙청되고 그의 처당숙인 김두봉이 쿠데타로 실각, 숙청당하면서 그는 금기인물이 됐다. 1980년대에 들어 재평가, 재조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와 그의 일대기와 2000년대 이후 훈장 서훈 노력이 시작됐다.”

이와 더불어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인 김원봉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김일성의 처지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했을 개연성이 크다.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시로 읽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민족시인 이윤옥 씨가 집필한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의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서간도에 들꽃피다’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집대성한 최초의 시집으로 저자가 10여년 동안 중국, 일본을 비롯한 전국을 누비며 수집한 사료를 토대로 구성됐습니다. ‘시로 읽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통해 역사 뒤편에 묻혀있던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행적과 업적,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문의 02-733-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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