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인은 보따리가 아니다
[기고] 노인은 보따리가 아니다
  • 관리자
  • 승인 2012.07.06 14:56
  • 호수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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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몽 기자/중랑

 아이들이 노인의 특징을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단다. 아이들의 철없는 생각이라며 탓 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의 부모와 사회의 잘못도 크지 않겠나.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부모라는 이름만 남아있는 노인들은 경제·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잊혀지고 있으니, 보이는 그대로만 볼 줄 아는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89세가 되신 이웃 할머니는 40대 초반에 홀로돼 8남매를 키우고 결혼시켰다고 한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도둑질만 빼고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는 말을 주문처럼 달고 사신다. 딱히 당신의 푸념을 들어줄 만한 사람이 없어도 앉으나 서나 뭐라 말하시는데, 어느 날 할머니의 푸념 상대로 필자가 낙점됐다. 할머니의 남편은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이 있었는데, 막내 시동생은 자신의 첫 딸과 함께 젖을 먹여 키웠다고 했다.
가족사 소개만 두 시간이 걸렸으니, 지루하고 흥미가 없어져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를 끊어야 할까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치고 들어가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폭 운전자처럼 중앙선을 넘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적당히 포기하며 듣다보니 할머니의 청각과 기억의 엉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카랑카랑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조금은 질려했다. 헌데 그것은 당신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잡으려는 안간힘이었던 것이다.

전문가는 화가 나도 말하고 싶은 것을 10초만 참으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10년, 20년, 30년도 더 많은 시간을 참아야했다.

8남매를 결혼시켰으니 자식 내외가 16명이나 되는데, 어느 누구도 할머니를 모시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고3 수험생이 있다고, 맞벌이를 한다고, 셋집이라고, 시부모 눈치가 보인다고, 돈이 없다고…. 이유 아닌 핑계로 어머니를 외면했다.

그래서 10초 동안 참은 것이 실은 수십 년을 참은 것일 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그러하니 손자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냄새 나는, 불쾌한 보따리 취급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데 대학교에 다니는 손자가 들어오더니, 이방 저방 문을 열어봤단다. 그런데 할머니를 보고도 “아무도 없네”하며 나갔다고 한다.

이런 실정에 비록 ‘보따리’일망정 화를 내며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입은 말을 할 때라야 살아있는 것이다. 보따리도 생각하고 말하고 싶어 한다. 밥만 먹는 입은 이미 죽은 입이 아닐까.
노인에게 화를 10초간 참기를 강요하는 것보다, 먼저 노인을 ‘누군가’에 끼워줘야 하지 않을까. 나이 들어 청각이 둔해져도 가족으로 대접 받으면 귀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노인이 행복해 지면, 무릎에 손자손녀를 눕히고 배를 쓸어주며 “할머니 손은 약손…”하고 정겨운 콧노래가 창을 넘어 하늘의 별을 반짝이게 할 것이다. 잠든 손자손녀의 쌔근거림과 할머니의 부채바람에 쫓겨 날아가는 모기소리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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