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의 대형향로를 보자 지친 몸과 마음까지 치유
대성당의 대형향로를 보자 지친 몸과 마음까지 치유
  • 김상교
  • 승인 2013.06.28 14:34
  • 호수 3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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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김상교 한국해양고속 대표
▲ 김상교 한국해양고속 대표 부부가 중세시대 순례자들의 행렬을 형상화해 놓은 조각 작품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했다. 하루 평균 28km씩, 800km를 걷는 대장정을 33일 만에 끝마쳤다.

“70대의 스페인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남편 사후에
고인을 추모하며 걸었다”

 

▲ 밀밭이 펼쳐진 흙길을 묵묵히 걷는 그 순간이 힐링이다.

58세 나이에 버켓 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 하나를 해냈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걷기로 마음을 정한 건 작년 9월의 일이었다. 제주 올레 길을 걷던 중 일본인을 만났다. 미쓰비시중공업에 다닌다는 초로의 남자는 도보로 세계를 여행한다고 했다. 제주에 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들려주는 순간 필이 꽂혔다. 아내(김연희·58)도 선뜻 동의했다.
유럽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1100년 야고보 성인이 복음을 전파하던 그 길이다. 그가 순교한 이후 수많은 순례자가 떠났던 길이지만 현대에 와선 배낭을 메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보여행으로 인식되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7가지 루트가 있다. 그 중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 가스띠야-갈리시아-아라곤을 거쳐 산티아고까지 가는 가장 많이 알려진 코스를 선택했다. 총 길이 800km. 기간은 33일.
준비에만 3개월이 걸렸다. 왕복 비행기 표(150만원)를 예약하고, 배낭과 매트, 고어텍스 등산화, 우비, 슬리핑백 등을 구입했다. 체력단련을 한다고 전국의 등산로를 찾기도 했다. 이미 그곳을 다녀온 이들이 쓴 책도 여러 권 보았고, 인터넷도 뒤졌다. 가장 큰 도움이 된 인터넷 카페가 ‘까미오의 친구들’이었다. 가장 저렴하고 실속 있게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카페를 미리 알았다면 항공비를 50만원 절약할 수 있었다.
4월24일,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드골공항에 도착, 파리에서 사흘을 보낸 뒤 TGV를 타고 6시간 걸려 국경도시 ‘생장’에 도착했다. ‘순례자의 길’ 사무소에 등록을 하고 크레덴샬 수첩(일종의 패스포드)을 받았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스페인정부에서 마련한 ‘알베르게’(게스트하우스 일종)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층침대가 마주보고 있는, 잠만 잘 수 있는 유스호스텔 분위기이다.
4월27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바게트 빵과 우유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목표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팜플로나까지 28km를 걷는 것.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 30여명 속에 섞여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강렬했고 공기는 맑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사이로 난 황토색 길을 걸었다. 점심은 준비해간 빵으로 해결했다. 배가 고파 바나나를 사 먹기도 했다.
산을 넘는데 눈이 왔다. 이곳은 기온 차가 심하다. 오전에는 4도까지 내려갔다가 한낮에는 27,8도까지 오르고 저녁에는 10도로 떨어진다. 사람들 옷도 반팔 티셔츠부터 가죽점퍼까지 다양하다. 또 다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크레덴샬 수첩을 내밀자 내 이름과 국적을 적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도장은 나중에 순례자의 길을 완주했다는 징표가 된다. 발은 아프지 않았지만 몸이 힘들었다. 샤워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슬리핑백에 들어가 바로 잠들었다. 서양인들은 낮에 잔디밭에 뒹굴어 몸에 진드기를 붙여온다. 숙소마다 새 시트를 제공하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엔 진드기가 기어 다닌다. 그걸 피하려면 슬리핑백이 필요하다.
다음날부터 강행군이었다. 길게는 35km 짧을 때는 20km를 걸었다. 출발 당시 배낭의 무게는 10kg였다. 2,3일이 지나자 배낭이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 누군가는 여행의 성공 여부가 배낭에 달렸다는 말도 한다. 배낭의 짐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준비해간 매트는 한 번도 쓰지 않고 그대로 버렸다. 아내가 준비해온 감기 몸살약도 버렸다. 약봉지 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싶지만 배낭이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숙소마다 짐을 버리는 데가 따로 있다. 거기엔 다른 이들이 버리고 간 옷이나 책이 수북하다.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기도 한다.
처음엔 온몸이 아팠다. 발목과 무릎, 골반 뼈가 너무 아팠다. 특히 발바닥이 아팠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자 환경에 몸이 적응했는지 아픔이 덜했다. 걸어도 걸어도 목적지가 안 보이고 쉴 만 한 장소도 없다. 오솔길, 숲 속길, 시멘트길, 돌길, 아스팔트길, 흙길...온갖 길을 걸었다. 부부의 체력이 서로 달라 아내보다 훨씬 뒤처져 걸었다. 혼자 4,5시간씩 묵묵히 걷는다. 자연스럽게 지난 일을 되돌아보게 됐다. 어린 시절과 성장기,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을 커가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한 사람씩 머리에 떠올랐다. 특히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평소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보기도 했다. 눈물도 하염없이 흘렸다. 그러고 나자 마음 속 응어리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도 비우게 되고, 얻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도 사라지게 됐다.
걸으면서 ‘나는 왜 걷는가’ 자문했다. 걷는 도중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중반에 접어들어도 구하지 못했다. 결국 여정이 끝날 때까지 시원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미 많은 생각을 했고, 마음을 비웠고, 그 자체가 나에게 변화를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길을 걷는 여행객들과는 쉽게 친구가 된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더불어 걷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심전심이 된다. 70대의 체코인 부부와 60대의 한국여성 세 사람은 서로 친해져 여행 내내 함께 걷는 모습이었다. 70대의 스페인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남편 사후에 고인을 추모하며 걷는다고 했다.
지친 몸으로 숙소에 들어서면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준다. 순례자 길 덕분에 자칫 폐허로 변할 지방의 작은 마을들이 되살아났다. 여행객들이 쓰는 돈이 그들의 소중한 관광수입이기 때문이다. 순례자 길은 안전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 놓았다.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따로 있어 무료로 치료를 해주기도 한다. 교통편도 잘 돼 있다. 발목을 다쳐 걷지 못하거나 힘들어 못 걷는 이는 버스로 이동한다. 우리 부부는 한 번도 버스를 타지 않았다.

▲ 유럽의 남단에 있는 ‘피니시 페레’.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소지품을 불태우며 순례의 끝을 기념했다.
▲ 순례자의 길 완주를 마치고 관광차 들른 톨레도 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성체거양의식’의 하나로 성모마리아 문장을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33일째 되던 5월 28일 오전 10시, 우리 부부는 드디어 목적지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어떤 이는 바닥에 벌렁 드러눕고,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순례자의 길’ 사무소에서 완주증명서를 건네받는 순간, 정말로 내가 800km를 33일 동안 걸었다는 게 실감 났다. 뿌듯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에는 피로도 잊었다.

▲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로하는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천정에 매달린 대형향로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이 장관이다.

이날 오후 12시, 야고보의 유해를 모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순례자를 위로하는 미사가 시작됐다. 성당 내부와 제단의 정교하고 화려한 예술장식과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연주, 6명의 성직자가 흔드는 대형향로가 우리 부부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곳에서 느낀 것들이 삶에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내면을 유유히 흐르는 것을 느낀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사소하게 차 한 잔 하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되고 그런 순간이 행복을 주었다.
서울은 모든 것이 풍성하다는 걸 느꼈다. 과분할 정도로 풍성하다. 음식이 특히 그랬다. 요즘 우리 부부는 식탁에서 반찬을 확 줄였다. 반찬 한 가지로 식사를 한다. 그마저도 지지고 볶는 거창한 요리가 아니라 단품에 불과하다.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졌다. 각자 몸무게가 5kg씩 줄었다. 내 경우 고혈압 약을 먹지만 의사가 약 용량을 줄여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주변 사람에게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우울증을 겪는 이에겐 더 없이 좋다. 그곳은 젊은 서양친구들이 많이 찾는다.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영어 단어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 그들과 금방 친구가 된다. 그들과 마음을 나눈다는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해주고 우울증을 걷어간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극기 훈련 코스가 아니다. 건강과 돈, 시간여유 등 삼박자가 맞아야 가는 곳이 아니다. 그 중 하나가 부족하더라도 시도할 만하다. 실제로 파킨슨병이 걸린 이도 보았고, 남편이 끄는 휠체어에 탄 부인도 보았다. 발이 부어 도저히 못 걸을 것 같은 프랑스 사람도 가다 쉬고 가다 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비용도 다른 여행에 비해 극히 저렴하다. 대략 1km에 1유로가 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비행기 표 값을 제외한다면 800km 곱하기 1유로(약 1500원)=120만원이다. 이 가격으로 건강도 지키고, 멋진 풍광도 보고, 욕망과 회한으로 가득 찬 몸뚱어리도 비우고...얼마나 좋은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 “당장 떠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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