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350명 빈병·폐지 팔아 기금 1억원 모았다”
“회원 350명 빈병·폐지 팔아 기금 1억원 모았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7.25 18:34
  • 호수 3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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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대 규모 자랑하는 제주시지회 연상동 경로당

대학장, 시장, 군수 출신 많아… “오라하지 않아도 온다”
하루 2명씩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돌아가며 당번제
서귀포시장을 지낸 회원도 솔선해서 당번으로 ‘비지땀’

 

▲ 제주 연동에 있는 연상동 경로당은 회원들의 봉사와 성원으로 모범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고 1억원 기금 조성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맨 오른쪽이 고두길 회장.

서울에서 한평생 살다 제주로 귀향한 이태부(92) 어르신은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연상동 경로당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며 “농촌에는 경로당이 잘되고 도심지에는 경로당 회원 수도 많지 않고 활동도 좀 부진한 것이 일반적인데 이 경로당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제주시 연동 534-1에 위치한 연상동 경로당(회장 고두길)은 2008년 대한노인회가 주관한 전국 경로당운영사례 발표대회에서 최우수경로당으로 선정됐다. 그런데 최근 회원 수 350명으로 전국 최대인 이 경로당이 자체 기금 1억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7월 중순, 아침 7시 대한항공편으로 제주에 날아가 경로당을 찾았다. 주변에 제주 도청, 교육청, MBC·KBS 등 언론사 등이 모여 있다.
고두길(81) 회장은 호주머니의 동전으로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꺼내 기자에게 내밀었다. 고 회장은 “음료수를 마시려면 누구든지 자기 돈을 내야 한다”며 “자판기 수익으로 사무장의 월급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자판기는 3년 전 600만원을 들여 구입한 것이다. 경로당 옆에 있는 케이블방송사 KC방송 사람들이 경로당 옆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 회장은 “저 사람들이 자판기 최대 고객이다”고 귀띔했다.
‘전국 최우수경로당’ 간판이 걸린 현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바둑실이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벽면에 10여개의 크고 작은 상장과 사진액자가 걸려 있다. 고 회장은 그 중 한 사진액자 속 인물을 가리키며 “이 분이 제주경상대학장을 지낸 분이고, 여기는 서귀포시장, 이 분은 남제주군수 출신, 북제주군수 출신…”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분들이 다 모였느냐’고 묻자 “우리는 오라고 하지 않아도 그냥 다 온다”고 대답했다.
남제주군수 출신인 이군선(81) 어르신은 이와 관련, “시설이 깨끗하고 운영을 잘 해 소문이 났다”고 말했다.
사진액자 위로 명패 160여개가 촘촘히 붙어있다. 3만원부터 650만원까지 성금을 낸 헌성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1억원을 만든 일등공신들이다. 고 회장의 명패는 650만원에 있었다.

▲ 바둑실 벽면은 경로당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각종 상장과 단체기념사진들이 걸려 있다. 벽면 맨 위에 성금을 낸 헌성자들의 명패를 걸어놓았다.

안쪽으로 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체력단련실이다. 러닝머신, 안마의자, 자전거 등 운동 기구가 양편으로 놓여 있었다. 2400만원을 들였다고 한다. 단련실 옆은 대회의실. 테이블, 의자가 두 줄로 놓여 있었다. 130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한 달에 두 차례 급식을 하고 회의도 한다. 노래방 시설도 갖추어 놓았다. 회의실과 단련실 끝에 주방이 붙어 있다. 경로당은 연건평 350평의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 된 현대식 시멘트 건물이다. 지하에는 청년회, 유도회가 있고, 2층은 강당이다. 경로당 건물 뒤편으로 게이트볼 구장도 있다.
1억원을 모은 계기와 경위가 궁금했다. 고 회장은 “가정도 그렇지만 돈이 있어야 안정 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전임 회장으로부터 200만원을 넘겨받아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고 대답했다.
“한림공원 송분규 회장이 300만원 냈고, 다른 경로당에 간 분도 우리 경로당에 50만원을 내주었다. 김승필 연동자치위원장의 경우는 치과원장으로 있는 아들이 매년 50만원씩 갖다놓았다. 그리고 빈병·폐지를 팔아 만든 돈이다.”

-회원들이 폐지도 줍는가?
“그렇다. 나도 줍는다. 여기가 주변에 가정집이 많아 그게 가능하다.”
-폐지는 얼마나 도움이 되나?
“한 달에 수십만원밖에 안 되지만 그걸로 사무실 운영비로 충당한다. 행정기관에다 지원해 달라고 부지런히 요청한다.”

고 회장은 제주 애월 출신으로 화물운송사업을 크게 했다. 서울역에 ‘오양항공’이라는 사무실을 차려놓고 부산·대구·제주에 지점을 두었다. 돈도 많이 만졌다. 2006년 경로당에 놀러왔다 붙잡혀 이듬해 회장이 됐다.
고 회장은 “하마터면 이 자리에 있지 못할 뻔 했다”고 말했다. 2012년 2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서울대학병원으로 실려 가 12시간 수술을 받았다. 다리의 혈관을 잘라다 심장의 막힌 혈관을 잇는 대수술이었다. 고 회장은 “작년 3월, 우리 집에서 임원회의 하면서 회장직을 그만두겠다고 퇴임 인사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 박지택(79) 부회장이 ‘회복 중이니까 임기는 채워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 다시 맡게 됐다. 회원이 다 같이 염려해준 덕택에 회복이 빨랐던 것 같다”며 웃었다.
박 부회장은 “공무원들이 (고 회장) 임기가 언제냐고 묻는다. 하도 달래니까 그만두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라며 거들었다. 고 회장은 “우리 회원들이 나 보고 ‘공금으로 밥 사 달라’고 하지만 난 안 산다. 오히려 ‘나보다 연금 많이 받는 너희들은 밥사면 안 되냐’고 되묻는다”고.

▲ 경로당 어르신들이 오전부터 에어로빅으로 땀을 흘리고 있다.

2층에서 음악소리가 쿵쿵 울려댔다. 회장실을 나와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20여명의 여성어르신들이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날 제주 날씨는 33도를 기록했다. 오전이지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다. 흰색 바지에 파란 티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로 멋을 낸 어르신의 몸동작은 날다시피 했다. 이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몸을 흔들어 댄다. 바둑실 옆 대회의실에서 여성 어르신 5명이 모여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회의를 하고 있나?
“우리는 급식을 담당한다. 이번 급식 날 어떻게 할 건가 얘기 중이었다.”
10년째 경로당을 찾는다는 최금화(78)어르신은 “친구들과 운동하러 매일 오다시피 한다”며 묻지도 않았는데 고 회장에 대해 “땔 때가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추켜세우는 말인 듯싶다.
-‘땔 때’가 무슨 뜻인가?
“하나도 뺄 것이 없이 다 잘 한다는 뜻이다.”

연상동 경로당 운영의 한 가지 특색은 당번제이다. 하루 2명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경로당에서 △외부 방문객 안내 △주변 청소 △문단속 등의 일을 한다. 이 일에는 열외가 없다. 전직 시장, 전직 군수도 피해갈 수 없다. 서귀포시장을 연임한 현치방(83) 어르신은 “우리 같은 공직자 출신이 앞장서 하면 자연스레 회원들의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며 “같은 동네 살면서도 얼굴을 모르는 이가 있지만 당번 활동하면서 얼굴도 익히고 좋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는 역사문화탐방이다. 매년 5월, 빨간 모자에 빨간 티셔츠를 입고 관광버스 3, 4대에 나눠 타고 제주의 유적지와 관광지를 둘러본다. 박 부회장은 “그냥 즐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청소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연상동 경로당은 지난 6월 27일,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고 기금 1억원 조성을 축하하는 잔치를 펼쳤다. 대형천막 8개를 설치하고 풍물로 흥을 돋웠다. 도 국장, 의회 의원, 대한노인회 임원 등 내빈 550명을 초청한 가운데 상도 주고, 고전무용, 색소폰 연주, 웃음체조를 선보였다. 고 회장은 “평생 초저녁에 잠들면 다음날 아침에야 눈을 뜨는데 이번 행사 때문에 처음으로 밤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오후 3시경, 경로당 안은 한산했다. 바둑을 두던 어르신들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사무장도 퇴근하고 당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로당 뒤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파란색 인조잔디가 깔린 게이트볼 장에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였다. 이 시간이면 게이트볼을 즐기는 어르신들을 볼 수 있지만 이날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구장 경계선에 있는 사제단에선 매년 정월, 연동 동민의 안녕과 번영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경로당은 송년회와 신년회 때 떡국을 먹으며 운영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이날 갤로퍼를 운전하며 기자를 이곳저곳 안내한 박지택 부회장은 3000평 밀감농사를 짓는 현역 농부다. 20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낸다. 3남2녀를 두었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 같이 살지도 않는다. 박 부회장은 “작년에 농장에서 수천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우리 경로당에는 나 같이 건강한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2003년에 창립한 연상동 경로당이 5년 만에 최우수경로당 자리에 올랐고, 회원도 가장 많고, 부자인 이유를 핸들 쥔 박 부회장의 햇빛에 그을린 팔뚝을 보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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