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吉田耕三) 목사
서울 일본인교회 요시다 고조(吉田耕三) 목사
  • 조종도 기자
  • 승인 2013.08.02 10:32
  • 호수 3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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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 사진=조준우 기자

일본 정치인 망언은 역사에 무지해서 저지르는 잘못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알고난 뒤 엄청난 충격
평생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 한국에 살기로 결심


“독도(다케시마)는 6세기 초 신라시대부터 한국의 관할 아래 있었다……(1945년) 패전과 동시에 독도를 한국에 반환해야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일이다.”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수상과 각료가 참배하는 것은 전쟁이나 침략지배 및 그에 따른 잔학행위를 긍정·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인의 주장이 아니다. ‘살아있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요시다 고조(吉田耕三·71) 목사가 줄기차게 외쳐온 말이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망언이 잇따르면서 한·일, 중·일 관계는 얼어붙었고 동북아의 긴장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동아시안컵 축구 경기에서 한국 응원단이 양국 간 역사문제를 거론하는 플래카드를 내건 것에 대해 시모무라 일본 문부과학상이 ‘민도가 문제될 수 있다’고 비난해 물의를 빚었다.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외교적 갈등 때문에 한·일 정상회담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서 32년째 한국 땅에서 목회하고 있는 요시다 목사의 언행은 많은 양식 있는 일본인들을 깨우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요시다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서울 성수동 일본인교회를 찾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근처 일본인교회 예배당에는 한·일 친선선교협력회 이름으로 ‘안중근 의사 순국 1백주년 기념’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한국 젊은이들의 뇌리에서조차 점차 잊혀져가는 인물을 추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방문객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일본 지도자들이 자꾸 망언을 해 이웃나라의 분노를 사고 있는데.
“일본인들 중에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해 식민통치를 자행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아 저도 몰랐어요. 제가 제암리교회(1919년 기독교인을 학살한 장소)와 탑골 공원(3·1운동이 시작된 곳)에 갔다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일본 정치가들은 한·일간 역사를 모른 채 제멋대로 발언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독도의 역사,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제멋대로 이야기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이유가 그건가요?
“예. 알아야 회개도 하고 사죄를 할 텐데 그들은 무지합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 당국자가 바뀔 때마다 적극적으로 서한을 보내고 있습니다. 총리뿐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보내고요. 국회의원이 망언을 하면 2~3일내에 당장 그 사람에게 역사에 관한 문서를 보냅니다. 그들이 알도록 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총리 자신이 직접 보지 않더라도 비서실장이나 관계자들이 한번이라도 보지 않겠습니까.”

요시다 목사는 지난 4월 25일 아베 신조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경고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공인의 자격이든 개인의 자격이든, 시기가 언제이든지’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야스쿠니 문제는 야구에서 말하자면 1루 베이스와 같은 것으로 기본 중의 기본문제”로 보았다. 피해자와 피해 국민의 기분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무지와 민족주의적인 교만함에서 나왔다는 것.
아베 총리가 ‘침략행위는 아직 정의되고 있지 않다’ ‘침략을 했는지 어떤지는 나라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 4월 23일 발언에 대해서는 “가해국의 총리로서 지극히 분별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를 상징하는 ‘평화비’ 제막과 관련, 일본 당국에서 철거를 요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시 노다 총리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그는 2011년 12월 15일 보낸 서한에서 “생리도 시작되지 아니한 10대 소녀들이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을 겪었다”면서 “이 소녀들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고 양심 없음을 질타한 바 있다.

-최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가 대승을 거두었는데.
“일본 유권자들은 역사인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단지 아베노믹스가 등장해서 조금이나마 경제가 호전될 것 같으니까 (아베에) 관심이 있는 거죠. 대중매체는 참의원 선거에 대해 자민당의 압승이라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말뚝 테러를 한 스즈키가 낙선했고, 위안부 할머니에게 망언만 하던 하시모토의 유신회도 참패했습니다. 저는 조금 더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도 계속 기도할 거예요. 아베 신조는 몇 년 전에 몸이 병들어 갑자기 그만둔 적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74년 8월 한국에서 ‘엑스플로 74’ 행사가 열렸어요. CCC(대학생선교회)가 주최한 행사였는데, 고 김준곤 한국CCC 회장이 일본에서 3000명의 목회자·성도를 초청했습니다. 일본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5~6년쯤 지난 때였는데, 당회(목사·장로로 구성된 교회기구)에서 일주일간 휴가를 갑자기 줘서 한국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 내 크리스천 신문사가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서 약 1000명의 일본인 목회자·성도가 대회에 참여했지요. 그게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십자가가 많은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주일간 낮에는 영락교회에 머물고 저녁에는 여의도 광장 집회에 참석해 큰 감동과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19세기 개화기 이후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서구에만 관심을 가졌다. ‘아시아를 떠나서 서구사회로 들어가자’는 뜻의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일본 교육의 기조였다. 그런 일본식 교육에 길들어져 있던 그에게 한국의 기독교 부흥은 놀라웠고, 큰 도전이었다. 74년 방문을 계기로 해마다 여름휴가 땐 1주일씩 한국을 방문해 머물렀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유가 3·1운동에 있다는 자신만의 깨달음도 얻게 됐다.

-한국에 어떤 마음으로 왔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사죄해야겠다는 게 첫째입니다. 성경에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장 23-24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겐 일본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앞서 형제 나라인 한국에 용서를 구하고 화목해지라는 뜻으로 해석됐습니다. 일본 국가나 교회나 한국에 제대로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한 저 개인에게는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로 한국에 가라는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한국에 사죄해야 하나님이 일본을 용서하시고 한국 교회와 같은 부흥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접한 뒤 한국에서의 사역에 강한 열망을 갖게 됐다. 그래서 한·일 친선선교협력회를 만든 목회자로 그가 가장 존경하는 모리야마 사토시(森山諭, 1908~1996) 목사에게 한국에서 사죄와 화해의 사역을 하고 싶은데 기회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편지하기도 했다. 마침 한국에는 일본인 목회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제 때 맺어진 한국남성-일본여성 부부가 꽤 있었는데, 한국인 남편이 죽고 혼자 남은 일본 여성들은 일본어로 설교하는 목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리야마 목사는 요시다 목사를 추천했다. 모리야마 목사는 도쿄에서 나고야로 장거리전화를 걸어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왔다”고 말했다.
문제는 자신이 맡고 있는 나고야 교회의 후임이 안 정해진 거였다. 신앙이 바로 선 후임 목사를 세우는 데 3~4년 걸렸고, 1981년 가을 마침내 가족과 함께 서울 일본인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딛은 지 7년이 지난 때였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부터.
“우리 가족은 일본 전통종교인 신사를 숭배했습니다. 집안에 작은 신사와 불교 제단이 있고 부엌의 신도 있었지요. 소학교 5학년까지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세 제단에 먼저 제사를 올리도록 부모님이 가르쳤어요. 그런데 5학년 때 주일학교가 우리 마을에 생겼습니다. 어떤 기독교인 가정에 어린 딸이 죽었는데, 장례식을 마친 뒤 죽은 딸아이의 부모가 중심이 돼 주일학교를 시작했어요. 다다미방을 개방해 주일학교를 열었는데 그 동네 어린 아이들이 70~80명이나 모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성탄절을 맞아 15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때 저도 세례를 받았죠.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세례 받은 직후입니다. 범죄가 많은 때라 경찰이 되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범죄하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만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일본인교회 주보에는 한국과 일본 지도 사이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그가 기도 중에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을 그린 거라고 했다. 그는 위안부나 독도 관련 문제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 해결의 길이 없다고 믿고 있다.
슬하에 딸 둘이 있으며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큰 딸은 숙명여대를 졸업한 뒤 목사의 아내가 됐고, 둘째 딸은 여성 목사가 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은퇴시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요시다 목사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목회를 계속하겠다”면서 “내 생전에 한국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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