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민초들의 삶과 애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민초들의 삶과 애환
  • 정리=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8.29 18:53
  • 호수 38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어떻게 이혼하고 재혼했나”
▲ 시신을 내보냈던 광희문. 서울 중구 광희2동에 있다. 1396년 쌓았다.

양반집 부인도 남편이 써준 기별명문(이혼장) 있으면 재혼 가능
찜질방 같은 ‘한증소’에서 땀 빼며 병 치료… 승려가 운영


조선의 여성들은 이혼이 가능했을까. 재혼은 또 어떻게 했을까. 미아가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소소한 사건을 통해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들여다본다. 직업 저술가 정명섭씨가 최근 펴낸 ‘조선백성실록’(북로드)에서 발췌한 사건들을 싣는다.

미아는 어디서 보호했을까

▲ 종로구 계동 현대사옥 화단에 있는 제생원터 표지석.

조선시대는 미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정에선 길을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빈민구제기관인 제생원에서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명을 받아 제생원은 아이들을 관청 노비의 손에 맡겼지만 노비들 또한 가난한 처지라 친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자 제생원은 예조를 통해 세종에게 고아원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1405년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을 제생원에 모아서 돌보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던 세종은 이 요청을 흔쾌히 승낙한다. 1435년 6월 22일 조선 최초의 고아원이 한양의 제생원 옆에 세워졌다.
세 칸짜리 집을 지어 한 칸은 따뜻하게 온돌을 깔고 다른 한 칸은 난방시설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칸은 부엌으로 만들었다. 남종과 여종 한 명씩을 두어 아이들을 돌보게 했고 백성들 중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을 뽑아서 돕도록 했다. 세종은 관청 노비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기보다는 아이들을 한 군데 모아놓으면 나중에 부모들이 찾으러 오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혼증명서 있어야 재혼 가능
1456년 1월 11일, 사헌부에서 세조에게 ‘분경’이라는 백성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려고 남편에게 억지로 기별명문(棄別明文) 즉 이혼장을 받아냈으니 그녀를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조선시대에 무슨 이혼장이냐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는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의 이혼이라면 대부분 첩에게 눈이 먼 남편이 본부인을 쫓아내는 정도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교 이념이 강화되기 전인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이혼하기 쉬웠고 양반들도 종종 이혼을 했다. 사헌부는 분경이 억지로 이혼을 했으니 장 100대형을 내리는데 죄가 무거우니 속옷을 벗기고 곤장을 때리는 것이 좋겠다고 고했다.
1484년 2월 16일자 성종실록에는 양반들의 이혼과 재혼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현감벼슬을 했던 이윤검이 한양에 있을 때 청도의 본가에 있던 아내 손씨가 종 금산과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돌아가서 따졌다. 그러자 아내 손씨는 금산이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었다고 털어놨다. 이윤검은 아내에게 휴서(休書·이혼의 증서)를 써주고 갈라섰다. 그러자 손씨의 아버지 손감은 그녀를 다른 남자와 재혼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이윤검의 어머니가 아들이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는데 사돈이 며느리를 다른 집에 시집을 보냈다고 관아에 고발했다.
경상도 관찰사가 이 사건을 형조에 보고하면서 조정에 알려졌다. 양반의 아내가 종과 간통했으니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많은 대신들은 손씨와 금산이 간통한 현장이 발각되지 않았으니 간통죄를 논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이윤검이 어머니에게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과정을 보면 대신들이 간통이나 이혼에 대해서 나름 관대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결국 개인 가정사에 나라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으니 그냥 놔두라는 성종의 최종 판결이 내려진다. 판결이 이렇게 내려진 이유 중에 이윤검이 써준 기별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여자는 재혼할 수 있다. 그러나 휴서를 써주고 좋게 이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실록에 나온 이혼 관련 소송이나 사건들 대부분은 당사자들이 모두 처벌되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윤리를 따지는 양반과는 달리 일반 백성의 이혼은 비교적 쉬웠다. 복잡한 문서 대신 옷고름을 잘라주는 것이 끝이었다. 그럼 여자는 이 옷고름을 곱게 접어서 잘 챙긴 다음 새벽에 성황당에 나가 있다가 처음으로 만나는 남자를 따라가는 것으로 새로운 인연을 찾아서 떠났다.

질투로 여종 살해
1488년 5월 20일, 수구문 밖 왕십리에서 참혹하게 죽은 여자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수구문은 동대문 가까이 있는 작은 문으로 본 이름은 광희문이었다. 이 문으로 시신이나 죽어가는 환자들이 자주 실려나갔기 때문에 시신이 방치된 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신은 알몸이었고 온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검시 결과 음부에서 항문까지 날카로운 칼로 벤 흔적을 비롯해 시신에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온몸에 구타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하들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익명의 고발을 받아들이자고 건의했고, 성종은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하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이를 승낙했다. 6월 7일 정종의 서자인 선성군의 넷째 아들인 설성부수 철정이 이웃에 사는 이화의 집에서 부리는 여종 동비가 지난달 중순 매를 맞고 죽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조사관들은 즉시 이화의 집을 뒤지고 종들을 심문했다. 결국 종비가 수구문 밖에 버려진 시신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문을 받은 내은산은 5월 15일 이화가 동비를 죽이고 시신을 박석현에 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비가 오고 날이 어두워져 길을 잃자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시신을 한양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청계천에 버렸다고 증언했다.
이화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내은산의 진술이 오락가락해 성종은 이화의 종을 다시 심문했다. 그 결과 이화가 미모가 뛰어나 첩으로 삼은 여종 동비가 다른 종을 몰래 방에 들여서 관계를 맺은 것을 알고는 화가 나서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성종은 사실을 자백한 종들이 이화의 가족에게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 관청 노비로 소속을 변경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여러 차례 거짓말을 하고 범행을 부인한 이화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조선의 법률상 주인이 종을 죽인 것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성종도 한 발 물러나 사형 판결을 취소했다.

조선시대 찜질방은 환자 치료소
조선시대에도 찜질방이 있었다. ‘한증소’라고 불리는 이 찜질방에 관한 첫 기록은 1422년 8월 25일 세종이 예조에 명을 내려 땀을 배출시켜 치료 중인 환자들 가운데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이 있다며 이 한증소를 폐지할지 말지에 대해서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한증소 설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이용되어온 듯하다. 당시 한증소는 승려들이 운영했다. 1427년 4월 24일 기록에는 한증소를 운영하는 천우와 을유라는 승려가 세종에게 병자를 치료하는 데 쓸 쌀과 베를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 있다. 한증소의 치료효과는 나름 괜찮은 듯 했다. 1429년에는 혜일이라는 승려가 한증소를 세 곳으로 늘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세 곳의 한증소 중 두 곳은 남자와 천민으로 나눴고 나머지 한 곳은 여성들이 사용했다.
문종 1년 1451년에 경기도 교하와 개성 일대에 유행병이 퍼졌다. 약과 침으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자 문종은 개성의 활민원을 수리해서 환자들에게 목욕증위를 시킬 것을 지시했다.
조선의 한증소는 지금의 찜질방처럼 편의시설을 갖춘 대중적인 휴식공간은 아니다. 돌로 만든 밀폐된 공간에 소나무를 비롯한 땔감을 태워서 환자들의 땀을 배출시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의료보험이 없었다. 그 대신 한양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곳에서 공짜로 치료를 받거나 약을 받을 수 있었다. 한증소도 이런 의료 서비스 중의 하나였다.

경로당과 유사한 ‘기로소’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의 경로당과 같은 시설이 있었다.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기로소’가 그것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했다. 태조는 1394년에 친히 기영회(耆英會)에 들어갔다. 태종 초에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 하였고, 1428년(세종 10년)에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되고 간략히 기로소라고 불렀다.
정이품의 실직에 있는 자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는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 이들을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라 하였고, 인원의 제한은 없었다. 음직(蔭職)과 무관(武官)은 참여하지 못했다. 정이품 실직자 가운데 70세 이상인 자가 없으면 종이품인 실직자 가운데 1, 2인을 왕에게 추천하여 들어가도록 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