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가 안아주었던 기억이 아련”
“어릴 적 아버지가 안아주었던 기억이 아련”
  • 글·사진=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9.13 11:30
  • 호수 38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액티브 시니어] ‘메밀꽃 필 무렵’ 작가 이효석 장남 이우현
▲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효석의 초상화 옆에 선 아들 우현씨.

미국 국비 유학생으로 떠나, 2년전 귀국
이효석문학전집 발간 준비, 어휘사전도


단편문학의 백미라 불리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 ~1942)의 장남이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효석은 부인 이경원(1912~1940)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녀 나미(81)씨와 차녀 유미(78)씨는 서울에 산다. 막내아들은 생후 4개월 만에 기차 안에서 홍역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장남 이우현(77) 이효석문학재단 이사는 지난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그 나라에서 50년 동안 경영인으로 활동하다 지난 2011년 귀국했다. 이 이사는 지금껏 언론에 노출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단에서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존재 자체가 반세기 이상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작년 9월 ‘이효석문학재단’을 설립하고, 이효석문학을 총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9월 초, 서울 율곡로에 있는 ‘이효석문학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효석의 아들… 어떻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럴 만도 하지요. 언론사와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그럴 만한 계기도 없었고, 제가 그럴 만한 사람도 못됩니다. 한국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에 갔다온 후, 2년여 동안 ‘이효석전집’(5권·창조사)을 출판하고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왜 미국행을 택했는가.
“아버지는 소설 ‘창공’을 신문에 연재하고 받는 원고료로 끼니를 잇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특별히 커피를 구해 마시는 구라파적 생활양식을 즐기셨어요. 교과서에 실린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도 커피 예찬이 나오지요. 서구사회를 동경하셨던 아버지의 꿈을 대신 실현하겠다는 게 이유 중 하나에요. 여담이지만 나중에 저 세상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아버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외국의 도시에 대해 내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드려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이우현 이사는 1937년 평양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 이사가 세 살 때 복막염으로 눈을 감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2년 후 이효석도 결핵성 뇌막염으로 서른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린 이우현은 당시 강원도 봉평에 살던 조부모 손에 컸다. 진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고를 졸업했다. 이효석 역시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출신이다. 이 이사는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미국 위스콘신대 경영학과를 졸업, 엘라이드사·FBS 등 미국의 화학관련회사에서 30여년 근무하고 CEO로 퇴직했다. 미국에서 결혼해 2남을 두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가.
“못하지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거의 없어요. 한 가지 아버지가 나를 품에 안아주었던 느낌은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작품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게 전부에요.”

-유명작가란 사실 처음 인식한 건.
“6·25 전쟁 통에 ‘서울피란대구연합중학교’가 대구에 세워졌고, 서울의 모든 학생들이 그 학교를 다녔어요. 중학교 2, 3학년 때 일이에요. 국어선생님이 저를 불러내 세워놓고 “이우현이 바로 교과서에 실린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작가 이효석의 아들”이라고 급우들에게 소개하고 “이 작품은 자연을 서정적으로 잘 표현한 단편문학의 백미”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졌어요.”

가산 이효석은 전주 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으로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평창공립보통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1930년 동 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평양에서 숭실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했다.
한학자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신소설 이인직의 ‘혈의 누’ 등을 읽으며 문학에 심취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는 서구문학을 탐독했다. 체홉의 단편소설, 월트 휘트먼의 시, 윌리암 워즈워드의 낭만주의 문학, 헨릭 입센의 현대 드라마 등이 이효석 문학의 밑거름이 됐다.
경성제대 재학 중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산’ ‘들’ ‘분녀’ ‘수탉’ ‘화분’ 등 토속적인 작품을 썼고, 1936년 단편문학의 전범이랄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창공’ ‘녹색의 탑’ 등도 발표했다. ‘낙엽을 태우면서’ ‘청포도사랑’ 등 수필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문학재단’은 어떤 일을 하는가.
“지금까지 두 차례 이효석전집이 나왔지만 작품이 다 수록되지 못했어요. 내년 봄 10권 전집을 낼 계획입니다. 1930년대 작품들이라 강원도 방언도 쓰이고, 사용 안하는 어휘도 있고, 일본식 한자표기도 많아요.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수정해 ‘어휘사전’도 함께 펴낼 계획입니다. 그리고 전권을 디지털화해 DB 구축을 하려고 해요. 이런 작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려고 작년에 ‘이효석문학재단’을 설립했고, 1980년대부터 이효석문학과 생애를 연구해온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님을 재단 이사장으로 모셨어요. 아버지는 생전에 중·장·단편 소설 80여편, 산문·희곡·기고 등 80여편을 남겼어요. 15년이란 길지 않는 시간에 그렇게 많은 창작을 하신 점이 놀랍기만 해요.”

이 이사는 “각 학교와 대학 도서관에 이효석문학전집, DB를 기증할 계획”이라면서 “이효석 문학을 연구할 목적이라면 어떤 단체든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다”고 밝혔다.
문학재단에서는 ‘이효석문학상’을 주관하기도 한다. 데뷔 15년 이내의 젊은 작가들이 그 해에 발표한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해 상을 주어오고 있다.
이우현 이사는 “황순원문학상·김유정문학상 등 여타 다른 문학상보다 비록 상금은 적지만 젊은 작가들이 ‘영원히 젊은 이효석 이미지의 문학상’ 수상을 명예롭게 여긴다”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한국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이효석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