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채 노인전문요양원 ‘에덴원’ 이사장
정시채 노인전문요양원 ‘에덴원’ 이사장
  • 글·사진=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0.11 10:54
  • 호수 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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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노인 3명 백수잔치에 아코디언으로 축하공연 해드리기도”

3선 국회의원·농림부장관·대학 총장 등 40년 공직생활 끝내고 귀향
2004년 서울의 아파트·오피스텔 처분한 돈으로 노인전문요양원 시작


‘에덴원’ 가는 길은 멀었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 상마리에 주소를 둔 사단법인 노인전문요양원. 100세 노인이 3명이나 있고, 농림부장관·3선 의원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낸 이가 사재를 털어 세웠다고 해서 찾아가기로 했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로 목포역에 도착, 무안행 버스로 갈아타고 청계면사무소에 내려 에덴원에서 마중 나온 봉고차를 얻어 탔다. 10여분 달려 낮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요양원에 도착했다. 정시채(80) 에덴원 이사장이 2층 이사장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반갑게 맞아주었다. 살집이 전혀 없는 마른 얼굴과 체구였다.

-생각보다 규모가 꽤 크다.
“5000평 대지에 건물 4동(연건평 1000평)이 있고, 현재 95명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을 38명의 직원이 돌보고 있어요. 평균 연령은 86세고, 100세 노인이 3명(남자 1, 여자 2) 계세요.”

-100세 노인은 어떻게 관리하나.
“특별한 건 없어요. 다른 분들하고 똑같이 해요. 세분 모두 건강하세요. 여기 오신지 2~3년 됐어요.”

-사재를 털었다고.
“2004년 70세 되던 해, 40년 공직생활을 끝내고 뭘 할까 고민했어요. 남 밑에 들어가 월급 받을 수도 없고…. 사회에서 얻은 걸 도로 환원하고 봉사하는 생활을 하자고 했지요. 서울 여의도의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처분해 보탰지요. 지금도 사비가 들어가요. 물론 보험공단에서 운영비 전액을 지원해주지만요.”

-해보니 어떤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려워요. 이 분들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에요. 자기 집에서 도저히 모시기 어렵다고 해 여기 온 겁니다. 그런 이들을 100명 가까이 모시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지요. 여기서 1년에 10~15명이 돌아가세요. 그때 장례예배를 봅니다. 내가 기독교 장로에요. 신앙심으로 극복하지요. 신앙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만드는 겁니다. 생일잔치· 백수잔치를 챙기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러면 이분들이 정말 좋아하세요. 이분들이 나를 의지하고 산다는 사실에 보람도 느낍니다.”

▲ 100세 노인 이단금씨가 정시채 이사장을 보는 순간 반갑게 웃었다(왼쪽).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5년 전에 아코디언을 배웠다.

-아코디언 연주도 한다고.
“오래 전에 JP가 한 식사모임에서 아코디언을 건네받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봤어요. 거기에 매료돼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요. 5년 전 개인레슨을 받았어요. 생일잔치 때 들려주면 아주 좋아하세요. 우리가 합창단도 있어요. 남녀 10명씩 20명이 생일잔치 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합니다. 작년에 목포의 한 신문사 초청을 받아 성탄절 공연을 한 적도 있어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여기엔 치매 환자가 많아요. 전혀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식사를 하고도 안 했다고 그래요. 보호자에게 그 말이 들어가면 밥을 잘 안준다고 우리에게 추궁이 들어옵니다.”

1934년 진도 출신의 정시채 이사장은 전남대 법대와 동 대학 대학원을 나왔다.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32세의 나이에 무안군수가 됐다. 고 건 전 국무총리와 고시 동기이다. 광주시장과 전남도 부지사를 거쳐 11·12·14대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1996~1997)을 지냈다. 1976년 내무부 소방국장 시절 ‘119구조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초당대학 총장(1999~2002)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고시공부를 하게 된 건.
“진도중학교 2학년 때 공민선생님이 ‘누구든지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 고급 공무원이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계기가 됐어요.”

-32세 나이에 군수가 됐는데.
“고시에 합격하고 역대 최연소 나이(31세)에 광주경찰서장으로 부임했어요. 서장보다는 군수가 낫겠다 싶어 군수가 된 거지요. 군수 시절 농촌근대화를 하려고 지게를 없앴고, 그 대신 농로를 개설해 리어카를 다니게 했어요.”

-3선 의원이기도 하다.
“내가 예결위원장을 2번이나 했어요. 대한민국 예산이 내 손을 거쳐야 확정이 됐지요. 1986년 예산은 15조, 87년은 17조였어요.(참고로 내년 예산은 357조이다). 당시는 5공 초기, 성장발전단계라 복지비용이란 게 있었지만 별로 부각되지 않았어요. 요양원도 없었고, 노인에 대한 대우도 별로 없었지요.”

정 이사장은 의원 활동 중 ‘도서개발촉진법’ 제정을 손으로 꼽았다. 도서지역은 육지보다 운반비와 지역 인건비 등이 더 많이 소요돼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따라서 도서에는 육지의 배를 보조하라는 게 법의 골자이다. 정 이사장은 “우리나라 도서지역이 모두 그 법에 의해 발전했다”고 말했다.

장관 시절 활동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수출농업을 육성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시장이 좁아 어떤 품목이 풍년이 되면 그 농산물의 가격이 폭락하고 농부는 수확한 걸 갈아엎는다. 이걸 막으려면 시장을 외국으로 넓히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실사구시’다.

-롱런의 비결은.
“‘정도(正道)로 가야 한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수록 정도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항상 마음에 새겼어요.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었지만 다 극복할 수가 있었지요.”

-가장 잊지 못할 일은.
“내가 전남 부지사로 있을 때 5·18을 겪었어요. 부지사실에서 숙식하면서 도청을 사수했지요.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당시 시외전화도, 버스도 다 없었고 광주는 고립화됐어요. 기자들도 엄청 왔지만 송고를 못하는 겁니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가 부지사실 전화 한 대 뿐이었어요. 그 번호를 아직도 기억해요. 2국의 7234. 기자들이 그걸로 송고했어요.”

-생명의 위협도 느꼈을 텐데.
“물론이지요. 무법천지였지요. 한번은 내가 ‘대표들이 들어와서 수습하고,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어요. 그러자 시민군들이 내 목에 착검을 들이대고 ‘왜 돌아가라고 했느냐, 방송을 취소하라’고 위협했어요. 난 못한다고 끝까지 버텼지요. 결국 시민군들이 여학생을 데리고 와 ‘시민들 모이라’고 자기네가 방송을 하더라고요.”

-나중에 표창을 받았겠다.
“표창이 아니라 영창을 갔어요. 상황이 마무리되고 경찰·보안사·안기부가 포함된 정부합동조사단에서 내가 브리핑을 했어요. ‘광주사태 원인 중 하나가 군의 과잉 진압이었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의 가슴 아픈 부분이지요. ‘부지사가 시민 편에서 모든 일을 했다, 부화뇌동했다’는 이유로 나를 6일 동안 보안사 지하실에 가뒀어요.”

-어떻게 풀려났나.
“5일째 되던 날, 시민들이 내가 감금당한 사실을 알았고, 광주노인회와 유도회에서 연판장을 받으러 다녔어요. 부지사가 이 사태를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구속이 뭐냐, 석방하라고요. 신군부 판단에 ‘더 큰 사태가 또 날지 모른다’고 해 바로 내보내줘 부지사로 원대 복귀했지요.”

-초당대학에 안경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학생들 대부분이 안경 낀 걸 보고 초당대학 구내에 만들었지요. 3000점을 전시해놨는데 8점을 빼고는 나머지 모두 기증 받은 겁니다. 로마시대 무테안경부터 이승만 대통령 안경까지 전 세계 모든 종류의 안경을 다 모았어요.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 때 끼던 선글라스를 얻으러 미국에 있는 맥아더재단을 방문하기도 했어요.”

-기초노령연금을 두고 말들이 많다.
“복지라는 건 돈이 있어야 해요. 빚내서 복지하는 건 아주 잘못 된 겁니다.”

-하위 70%에 20만원 주는 건 어떤가.
“그건 괜찮아요. 처음 대통령 공약에 전체 노인에게 20만원씩 준다고 했잖아요. 그건 말도 안돼요.”

-행복한 노년을 보내려면.
“나도 노인이니까 잘 알지요. 노후 준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이 먹었다고 해서 남에게 지원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능력이 있는 범위 내에서 자립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에덴원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 성인 3명과 현인 8명의 묘가 있다는 ‘승달산’이다. 에덴원이 있는 마을 옛 이름은 효자동이다. 정 이사장은 마을 이름에 걸맞게 ‘효자노릇’을 하고 있었다. 국가와 사회에 크게 기여한 후 노년에 시골로 돌아와 힘없는 노인을 돌보는 그의 삶은 대한노인회(회장 이 심)가 펼치는 ‘노노케어’ 바로 그것이었다. 정 이사장은 “이 심 회장님도 여기를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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