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첫 방송한 위진록 전 KBS 아나운서
남침 첫 방송한 위진록 전 KBS 아나운서
  • 글·사진=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0.25 10:15
  • 호수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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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에 흔들리는 대한민국… 보수는 다 어디 갔나요”

아침 7시 남침 첫 방송 후 축구경기 보러 갈 정도로 서울 ‘평온’
도쿄 맥아더사령부에서 20년 방송 후 미국 이민 가 햄버거장사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은 이같은 내용의 임시뉴스를 내보냈다. 방송을 한 이는 위진록(84) 전 KBS 아나운서이다. 그는 당시의 일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위 전 아나운서는 남침 방송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UN군 총사령부방송(VUNC)에서 20여년 방송 일을 하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 위씨는 최근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 (모노폴리) 출간과 함께 책 홍보 차 잠시 귀국했다. 지난 10월 중순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위 전 아나운서를 만났다.

-남침 소식을 처음 방송했다고.
“전날 숙직하고 25일 새벽 5시 10분에 누군가 문을 두들겨 나가보았더니 육군 대위가 종이를 건네주면서 방송을 하라고 했어요. ‘38선 전역에 걸쳐서 북한 공산군이 전면적으로 남침을 시작했으니 국군은 모두 원대 복귀하라’는 내용이었어요. 나는 못하겠다고 했어요. 우선은 그 시간에 듣는 사람이 없을 테고, 이런 중대한 사안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위 전 아나운서는 전화상으로 방송국장에게 보고했다. 방송국장은 육군본부 정훈감실을 찾아가 이선근 정훈국장에게 내용을 확인한 후 방송국으로 달려와 위 전 아나운서에게 방송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시간이다. 첫 방송은 오전 7시 조금 못된 시각에 나갔다.

-당시 서울은 어땠는가.
“조용한 일요일이었지요. 철원이나 옹진반도 해주 근처에서 밤낮 총질을 해 대 이번에도 그 중의 하나인 줄 알았어요. 스튜디오 밖으로 보이는 나뭇잎에 간밤에 내린 비가 이슬처럼 맺혀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던 장면도 기억나요. 나 자신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어요. 방송을 마치고 서울운동장에 야구경기를 보러갔으니까요.”

-언제 전쟁 느낌이 들었는가.
“야구 경기 중에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다는 아나운서 멘트가 나오고 관중들이 흩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실제 총소리를 들은 건.
“25일 밤부터 긴장상태가 계속됐지만 26일까지도 괜찮았어요. 총소리도 안 들리고…. 그런데 27일 밤부터 쿵쿵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날 아침, 거리에 벌써 인민군이 들어왔어요. 그들은 사람들을 개의치 않고 지나갔어요. 길거리에는 남쪽의 젊은 군인들 시체가 즐비했어요. 그때부터 남쪽으로 가는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고 방송국 선배들도 피난 대열에 합류했어요.”

-왜 피난을 가지 않았는가.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죄 없는 사람을 마구 죽이겠느냐… 설마 했지요.”

위 전 아나운서는 6월 30일 경 방송국에 나갔다. 레닌 모자를 쓴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들이 방송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전부터 방송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위 전 아나운서에게 자백서를 쓰라고 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의 글을 짜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항상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으며, 방송할 때도 늘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심지어 미군 하지중장이 한국을 떠날 때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틀기까지 했다고 썼다. 실제로 위 전 아나운서는 방송 실수를 저질러 상사로부터 질책을 당했다. 그러자 평양방송국 사람들은 위 전 아나운서를 ‘동지’라고 부르며 ‘내일부터 방송을 하라’고 했다.
“고민이었어요. 내 목소리가 방송을 타는 순간 그들에게 포섭돼 협력한 꼴이 될 테니까요. 나중에 국군과 유엔군이 돌아왔을 때 내가 설 땅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튿날 전체 직원이 모여 궐기대회를 하는 자리에서 내가 일어나 큰 소리로 ‘동무’하고 불렀어요. ‘저는 연극동맹동지들과 일선으로 출동할 사람입니다. 마이크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일선에서 인민군 전사들과 같이 싸우다가 죽기를 원합니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뭣도 모른 채 ‘좋소, 동무 가시오’라고 말했어요. 그 자리를 쫓기듯이 빠져나왔지요.”
이후 90여일 동안 지인의 집을 전전했다. 영화배우 최무룡의 문산 집에도 숨어있었다. 안암동에 피신했을 때 그곳까지 인천의 함포사격 포탄이 날아왔다고 한다.

-인천서 쏜 포탄이 서울까지 날아왔다고.
“파편이 돈암동 일대에 떨어지기도 했어요. 어느 날 국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염이 덥수룩한 채 베잠방이 차림으로 방송국에 나갔더니 건물이 파괴돼 사라졌어요. 정동 덕수초등학교 옆에 있는 2층짜리 자그만 건물이었어요. 당인리에 방송국 송신소가 있어 그리로 갔더니 기술자가 있더라고요. 내가 직접 원고 쓰고 방송을 했어요,”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그럼요. 내가 원고 써가지고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방송을 되풀이했어요. 멘트가 끝날 때마다 ‘HLKA 여기는 서울 중앙방송국입니다’고 국명고지를 말하는 게 신나고 자랑스러웠어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후에 얻은 자유라서 더 감동적이었고요.”

위 전 아나운서는 송신소에서 방송을 계속하던 중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다. 하루는 일본 도쿄의 맥아더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담당자 매튜 중령이 그를 찾아왔다. 맥아더사령부는 6·25가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쿄에 UN군 총사령부방송(VUNC)을 창설하고 NHK 방송망을 통해 전파를 쏘았다. 매튜 중령은 위 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미국 CBS의 월터 크롱카이트와 비슷하다며 일본에서 한 달만 일하자고 제의했다. 전쟁을 치르는 폐허의 서울보다 부흥기에 접어든 화려한 도시 도쿄에 있는 걸 원해 선뜻 따라나섰다.

-일본에서는 무얼 했나.
“주로 반공이지요. 반공산주의 프로그램을 방송했어요. 뉴스와 해설, 방송극, 음악프로도 진행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연극공부도 하고 연극연구소에서 일본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300여편의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도쿄에서 8년 있다 미국과 일본의 강화조약에 따라 VUNC가 오키나와로 옮겨가면서 그곳에서 12년을 더 지냈어요.”

위 전 아나운서는 1952년 대포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최창숙씨와 결혼, 3남매를 두었다. 자녀들은 일본에서 미군 가족이 다니는 군인학교를 다녔다. 위 전 아나운서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자식들이 언어 문제로 놀림 당할 것을 우려해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 생활은 어땠는가.
“수중에 가진 돈 6000달러로 LA 하모사비치에 있는 낡은 가게를 인수해 햄버거 장사를 시작했어요. 8월이었는데 두 주일 지나자 손님이 뚝 떨어지는 겁니다. 알고 보니 해변가 여름 한철 장사였던 겁니다. 미국인에게 사기를 당한 거죠.”

좌절하지 않고 열두 달 팔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해냈다. 철판에 불고기도 굽고, 일본에서 익힌 솜씨로 데리야끼 등을 만들어 콤비네이션 접시에 담아내자 달짝지근한 간장 맛을 처음 맛본 미국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술술 풀린 건 아니었다. 보수적인 타운에 ‘노란 얼굴들’이 들어와 장사한다고 동네 아이들이 가게에 돌을 던지고, 가게 연통에 달걀을 던져넣기도 했다. 이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철이 들었는지 위 전 아나운서를 보고 ‘하이 미스터 위’라고 아는 체를 했다. 버스운전수도, 경관도 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하이 미스터 위’라고 인사했다. 위 전 아나운서는 “이 인사를 듣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햄버거장사로만 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가게를 처분하고 서점을 열었다. 한국 이민자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음식장사로 번 돈을 책가게로 모두 잃었다. 그후 한 달에 한 번 내는 지방 신문 ‘코리아뉴스’를 창간하기도 했다. 수필집 ‘하이 미스터 위’(1979) ‘이민 10년 생’(1984)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2011)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미국의 노인복지정책은.
“오바마 행정부도 노인복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내가 사는 곳이 55세 이상 되는 노인들이 모여 사는 시니어단지입니다. 산 밑에 있고, 소위 ‘기’가 좋다고 해 의사 출신, 변호사, 돈 좀 있는 이들이 들어와 살아요. 이들은 문제가 없어요. 자기 돈으로 사니까요. 그렇지 않은 노인들은 나라에서 ‘웰 페어’(Well Fare)라고 매달 700달러씩 기초노령연금 같은 걸 줘요. 의료는 무료지요. 그렇지만 소득세를 성실히 납부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닥터, 원하는 병원에 입원하지 못합니다.”

-미국서도 한국 소식 듣나.
“그럼요. 미국 방송과 일본 방송까지 들으니까 한국보다 더 많은 뉴스를 듣는 셈이에요. 한국의 젊은이들 절반 가까이가 6·25를 북침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 보수도 있을 텐데 이들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걱정이 됐어요. 좌와 우로 갈라져 싸우는 역사교과서 문제도 그래요. 어른들에게 책임이 커요. 교육이란 게 철저한 이념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해요. 좌익이 뭐라고 하면 우왕좌왕하면 안돼요. 지금 한국에는 확실하게 좌익에 대한 생각을 가진 이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모양이지요. 우리는 공산 치하에서 몇 번 죽을 뻔 했고 살아남으려고 애썼어요. 너무 안일하게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북한에 동경하는 이들이 많아 안타까워요.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유지 같은 걸 몸에 지니고 자란 사람이라서 조금은 다르게 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만 자꾸 그걸 흔들려는 사람이 있어요. 같은 진영에서도 흔들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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