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녀서 중국 황후로 ‘기황후’의 드라마틱한 삶
고려 공녀서 중국 황후로 ‘기황후’의 드라마틱한 삶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1.14 19:07
  • 호수 39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녀 없애고 고려풍습 원나라에 퍼트려
▲ 기황후로 추측되는 초상화. 타이페이고궁박물관에 있다. 오른쪽은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

15세 때 공녀로 차출… 원나라 실권자로 아들 황제로 만들어
홍건적 난 때 피난 후 행적 묘연, 연천에 묘 있다는 기록 남아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의 시청률이 치솟으면서 기황후(1318 ~1370)에 대한 관심도 높다. 드라마가 고려를 정벌하려 했던 기황후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기황후는 어떤 인물인가. 드라마와는 상관없이 역사 속의 인물 기황후를 만나보자.
기황후는 한 마디로 공녀로 차출된 비운의 여인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천하를 호령한 여성으로 거듭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여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 같은 여인이 또 없으며,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서태후보다 더 흥미로운 여인일 수 있다고 일부 역사가는 말한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중동·러시아·동유럽까지 지배했던 원나라는 100년 동안 고려에서 여인들을 강탈해 갔다. 몽골은 고려에서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했고,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어린 남녀 1000명을 바치라고 했다. 그 후 원나라에 항복한 귀순병들에게 짝을 찾아준다는 구실로 공녀 100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려는 이 일을 위해 ‘결혼도감’ 또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을 설치해 징발한 여자들을 보냈다. 공녀의 신분은 서민과 사대부 집안을 가리지 않았다. 이를 피하려고 조혼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다.

▲황제와의 첫 만남
기황후는 1333년 15세 나이에 공녀로 차출됐다.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는 5남3녀를 두었고 딸 둘은 무사히 시집보냈다. 기자오는 ‘총부산랑’이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국가에서 시행하는 딸의 공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국경을 넘어 원나라 황실로 끌려간 소녀 기황후는 그곳에 있던 고려인 환관 고용보의 눈에 들었다. 소녀 기황후는 빼어난 미모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말투도 양반가 출신답게 교양이 있었고 어리지만 당당한 기품이 느껴졌다. 고용보는 기황후를 원나라 11대 칸인 순제(順帝·1320~1370)의 다과를 시봉 드는 궁녀로 뽑았다. 순제는 13세에 제위에 올랐다. 그는 국사(國事)보다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에 탐닉하고, 후궁들에 묻혀 사는 등 나약한 지배자였다. 순제가 기황후를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필연적이다.
“너는 누구이던가?”
“저는 고려 익주(익산)라는 곳에서 온 지 2년이 되었사옵니다.”
“고려라…. 익주는 어디 있는가?”
“고려의 서쪽 해안 근처에 있습니다.”
“서쪽 해안이라면… 나도 열여섯 살 때 고려의 서해안 대청도(인천 서쪽)에 가 있었노라.”
“황제께서 어떻게 거기에?”
“황위에 오르기 3년 전 황실의 다툼에 얽혀 그곳으로 유배 갔지. 1년5개월 정도 머물렀노라. 원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황제가 됐지. 너와 나는 한때 같은 곳에 살고 있었구나. 여름 대청도의 모래밭에 누워 서쪽(중국)을 바라보며 잠들던 기억이 나는군.”
원나라 역사서 ‘원서’(元書)에는 기황후가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적혀있다. 황제는 틈이 나면 기황후를 불러 고려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차를 대령하는 시녀인지라 한적한 시간에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많았다.
당시 순제에게는 제1황후 타나시리가 있었다. 타나시리는 황제의 관심을 끄는 기황후를 시기하고 핍박했다.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 타나시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335년에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를 몰아내려는 모반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시리도 같이 죽임을 당했다.
순제가 기황후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려했지만 실권자이던 바얀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제1황후 자리는 몽고족 출신인 바얀 후투그에게 돌아갔다. 이 여자는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어진 성품의 여인이었다.
1338년 기황후는 순제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았다. 이듬해 바얀 후투그가 실각하자 기황후는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돼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한다. 기황후는 정치에 관심 없고 여색에 빠져있는 순제를 대신해 막후에서 원나라 정치를 지휘하고 황실을 관리한다. 권모술수보다는 실력과 진정성을 내세워 백성이 따라오게 만들었다.
그는 틈틈이 여자의 행실을 적은 ‘여효경’과 ‘사서’를 읽었고, 역대 황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상품 중 진귀한 식품은 먼저 태묘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 뒤에야 비로소 먹을 정도로 황실 제례를 존중했다. 기황후의 선정을 엿보는 일화가 있다. 1358년 원나라 전체에 대기근이 일어 사망한 사람만 20만이 넘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시체를 거두게 하여 경도 11문에 묻어 장사지내주었다. 대규모 수륙재(천도재의 일종)를 열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이 대기근을 위해 2만8000냥을 굶주린 백성을 위해 사용했고, 자정원의 쌀 560여가마를 풀어 허기를 면하게 했다. 불심이 깊었던 그는 또 화엄당 보수공사에 100만냥을 시주했고, 고려 금강산의 장안사에 거액을 보내 70여칸 규모로 중건하도록 했다.

▲고려말 쓰게 해
기황후의 영향력은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고려의 풍습이 중국에 전해지기도 했다. 수많은 원나라의 여인들이 기황후가 입었던 고려의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 등 복식 쪽에 유행을 일으켰고, 생활 풍속·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파됐다. 우리나라 전통한과의 일종인 매작과와 비슷한 음식이 전해지고, 고려병·고려다식·고려조청도 전해졌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역사소설 ‘기황후’를 쓴 제성욱 씨는 기황후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수집했다. 다음은 제씨의 말이다.
“기황후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충렬왕 이후 80년간 계속 되던 공녀 징발을 금지한 것이다. 환관의 징발을 축소했고, 원의 조정과 고려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된,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省)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를 폐지하기도 했다. 그때 만약 기황후가 입성론을 막지 못하여 고려가 원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씨는 “홍건적에 의해 원이 망하면서 그들은 고려까지도 원이라고 하여 우리 땅에까지 명나라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고 말했다.
기황후는 또 우리말을 고수하여 원나라에 있는 고려 출신의 사람에게는 항상 고려 말을 잊지 않도록 했다.
기황후는 순제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을 종용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지금의 북경)를 점령하고 기황후를 포박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가 1365년 대도를 다시 찾으면서 수습됐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진 틈을 타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을 가진 한족들이 홍건적이 돼 전쟁을 일으켜 원나라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를 점령하자 원나라 황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순제와 아들과 함께 몸을 피했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고려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보내지 않았다. 기황후는 이 일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가 사망하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순종이 됐다. 대도를 떠나 몽골 고원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 기황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후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행주 기씨 대종중은 기황후의 사망 연도를 1370년으로 적고 있다.

▲ 드라마 ‘기황후’의 하지원.

▲내정 간섭 비난 받아
역사지리서 ‘동국여지지’에 기황후의 묘가 경기도 연천의 야산에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능은 확인되지 않고 능이 있었다는 지역에는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됐다. 이것이 능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설이다. 역사학자들은 기황후가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원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기황후의 존재가 잊혀져 있다 드라마로 소개되면서 새롭게 떠오르자 그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 말들이 분분하다. 원나라에서 기황후의 아버지를 영안왕, 어머니를 왕대부인으로 했고,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했다.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을 한림학사로 삼았고,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기씨 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 없게 됐다. 기황후도 가족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은 결국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났다.
역사소설 ‘기황후’의 저자 제성욱 씨는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관들이 고려 출신의 공녀가 정후 자리에 오르고 그 아들까지 황제가 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기황후를 사리사욕만 채우고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으로 저평가했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