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 글·사진=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1.15 10:30
  • 호수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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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에 세운 ‘구봉서 학교’… 그 나라 대통령이 초청까지 했어요”

60년간 웃음 주고 코미디영화 해외진출에 기여… 은관문화훈장 받아
‘웃으면 복이 와요’ 직접 대본 쓰고 연기 “요즘 개그 프로는 봐도 잘 몰라”


한때 죽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던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87)씨를 만나기로 한 날, 공교롭게 경사와 조사가 겹쳤다. 경사는 구씨가 은관문화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이고, 안 좋은 일은 ‘충무로의 대부’로 알려진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의 장례식이다. 영화배우 고은아의 남편이기도 한 고 곽 회장은 구씨를 형님이라 부르며 함께 몇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초, 구씨의 집 가까이 있는 서울 잠원동의 한 카페에서 구씨를 만났다. 구씨는 한손은 지팡이를 짚고, 한손은 지인의 손에 의지한 채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축하드린다.
“과거에 포장과 훈장을 탔어요. 이번에는 속으로 금관훈장이었으면 했는데(웃음). 60년 동안 희극인으로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고, 초창기 한국 코미디영화의 해외진출에 기여한 점이 인정을 받았다고 해요.”

-지난달에‘구봉서의 코미디인생 60년’전시회도 열렸다.
“글쎄 말이에요. 서울 중구문화원에서 큰돈 들여 내가 출연한 영화·코미디의 포스터, 소장품을 전시했어요. 후배들이 날 위해 공연도 해주어 감사했고, 관객들 많은데서 후배들이 나에게 큰절해서 고마웠고요. 나하고 뭘 할 때 꼭 큰절을 해요. 그걸 보면 ‘내가 이렇게 늙었나, 낼모레 죽을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구봉서씨는 40여년 전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촬영하다 벼랑에서 떨어져 왼쪽다리를 다친 이후 잘 걷지를 못한다. 10년 넘게 투석도 한다. 구씨는 “병원에 불만이 많다. 수치가 높을 때 어떻게 되고, 심하면 투석까지 한다는 말을 의사가 미리 해주었어야 했지만 나에게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다. ‘투석은 곧 인생 끝’이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지내나.
“고은아 남편 곽정환이라고 서울극장 회장이 사망했어요. 장사 지내고 오늘 발인이에요. 새벽 6시에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갔다 왔어요. 화장터까지 쫓아가려니까 마누라가 나이 많은 사람은 그런 데 가지 않는다면서 내 대신 따라갔어요. 일주일에 서너번 병원 들락거리고, 일요일엔 교회 가고 바빠요.”

코미디언 구봉서는 일제 강점기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치과의료기기상이었다. 6세에 라디오 프로 ‘국어독본’에 출연해 책을 낭송하는 등 재능을 보였다. 1945년 대동상고를 졸업하고 성악가 겸 작곡가 현제명 선생에게 성악을 배우던 중 당시 인기가수 김정구가 이끌던 ‘태평양 가극단’에 입단했다. 우연한 기회에 희극배우가 됐고, 1969년부터 1985년까지 MBC 코미디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다. 영화도 300편 출연했다.

-코미디언이 된 계기는.
“내가 아코디언을 연주했어요. 유명극단에서 그걸 연주할 수 있다고 해 ‘며칠만 해보자’고 들어갔지요. 마포에 있던 도화극장에서 공연할 때 조연을 맡은 희극배우가 사라져버려 단장이 나를 무대에 올려보냈어요. 정신없이 하고 내려오니 사람들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어요. 그 길로 코미디언이 된 거지요.”

-코미디언 자질은 있었나.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연예계 생활은 생각도 안했으니까요. 내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운이 좋았나보다 해요. 사람이 잘 됐을 때 도취하면 사람 버려요.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해야지 ‘내가 제일인데, 누가 날 쫓아오랴’ 그런 생각으로 하면 인간도 버리고, 아무 것도 안돼요.”

-‘웃으면 복이 와요’하면서 잊지 못할 일은.
“요즘 후배들도 따라 하는 거 있지요. 이름 길게 하는 거.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그거 내가 생각해낸 거에요. 일본책 뒤져 쓴 겁니다. 당시는 코미디 작가가 따로 없었어요. 우리가 다 머리 짜내서 지어낸 겁니다.”

-일본말을 잘 하는가.
“일본말은 쓰지 않아 할 줄 모르고 읽는 건 일목요연해요. 내가 책 읽는 게 취미요. 일본에서 문예지를 보내주던 친구 덕에 잘 봐왔는데 그 친구가 죽는 바람에 못 보고 요즘엔 문고판 소설을 많이 읽어요. 최근에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읽었고…. 내가 코미디언이 안됐으면 큰 서점 주인이 됐을 거요.”

-잊지 못할 동료 코미디언이라면.
“곽규석이에요. 그 친구는 좀 늦게 나왔지만 좋아요. 깨끗하고 정직하고 약속도 잘 지키고…. 요즘은 노인네도 TV에 잘 나오지만 옛날에는 조금만 나이 들어도 바로 안 써요. 곽규석이는 그걸 못 참고 ‘에이, 나 안한다’하고 미국으로 갔어요. 거기서 할 게 있나요. 신학공부 해 목사 됐지요. 임종 때 가보지 못한 게 한이에요. 내가 비행기를 못 타요.”

구봉서씨는 연예인교회의 산파였다. 마흔 넘은 나이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1976년 서대문에 있던 그의 집 안방에서 연예인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로 참여했고, 남진·서수남·윤복희·정훈희·김자옥 등이 열심히 참석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평창동에 건물을 짓고 이름도 ‘예능교회’로 바꿨다.
-요즘도 연예인들이 많이 나오나.
“다들 다른 데로 갔어요. 나하고 신영균(영화배우)만 남았어요. 신도들은 2000명이에요.”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라면.
“아프리카 갔다 온 사람은 다 알아요. ‘구봉서 학교’라고 내가 우간다에 학교를 하나 지어놨어요. 초등학교 수준이지요. 요즘 유니세프에서 아프리카 아이들 불쌍하다고 기금을 모으듯이 옛날에 우간다도 그랬어요. 공부하려고 해도 비바람조차 피할 데가 없으니 돈을 좀 보내주면 가건물이라도 짓겠다고 해서 내가 버는 대로 보내고 교회에서도 성금을 모아 보내주었어요. 거기 졸업한 이가 교사가 돼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큰 결실을 봤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간다 대통령도 오라고 했지만 가보지를 못했어요. 학교 건물을 사진으로 봤는데 ‘수수깡’ 같은 걸로 지어놨더라고요. 수억을 보냈는데 왜 그런가했더니만 시멘트를 구하려고 해도 운송료가 비싸게 먹혀 엄두도 못 낸다고 해요.”

-‘구봉서 기념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은 벌이가 없으니까 그런 거 할 수가 없어요. 한 때는 잘 벌었어요. 내 동생이 5명에다가 자식 4형제를 두었어요. 그 아이들 모두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보내느라 돈 다 썼어요. 아이들이 용돈 안 주느냐고요? 용돈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달라고 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오(웃음).”

-혹 대물림하는 아들은.
“한 애가 방송 쪽 일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내 이름 팔지 말라’고 못하게 말렸어요.”

-개그 프로 보는가.
“봐도 잘 모르겠어요. 여자들이 정상적으로 웃겨야 하는데 얼굴에 뭘 그리고 웃기려고 하는 게 맘에 안 들어요. 그래도 후배들이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불쌍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그래요. 우리나라 방송이 드라마 제작에는 돈을 쓰지만 코미디에는 돈을 안 쓰려고 해요. ‘너희들이 몸으로 웃겨라’ 이거지요. ‘웃으면 복이 와요’팀은 녹화 끝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음 회를 준비했어요. 좋은 게 안 나오면 다음 주 방송은 이거에요(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냈다).

-볼 수술을 했다고.
“아니야. 난 얼굴에 뭐 대는 거 싫어해요. 미국에서도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거 어디서 했느냐고요.”

-영화도 많이 찍었다.
“어느 기자가 내가 영화 400편을 찍었다고 해 조사해보니 300편밖에 못 찾았대요. 기억에 남는 건 ‘남자식모’지요. 그게 히트해서 남자 시리즈가 그 뒤로 쫙 나왔어요. ‘막둥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준 ‘오부자’란 영화도 잊을 수 없고요. 선생으로 나온 ‘수학여행’은 1969년 테헤란국제영화제 작품상을 받기도 했어요. 영화하면서 밤 샌 기억밖에 없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세종문화회관이 옛날에 시민회관이었을 때 대중예술은 거기서 공연을 못했어요. 곽규석이하고 나하고 둘이 그 무대에 섰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방송 신념이라면.
“나는 누구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나도 너희만큼 할 수 있지만 안할 따름이다’고 노상 그 생각을 했어요. 요즘도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오지만 내가 안합니다. 난 일반인에게는 고개를 숙이지만 높은 데 있는 이들한테는 절대 고개 안 숙여요. 국회의원한테는 더 그러고요.”

-왜 하필 국회의원인가.
“거 보세요. 국회의원들이 한 달에 얼마 가지고 가는 줄 아세요. 1300만원이 넘어요. 저들이 뭔데. 시골 기차역에서 국회의원과 싸운 적이 있어요. 역장이 나를 알아보고 작은 방으로 안내했어요. 거기 큰 난로가 있었어요.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문을 열고 안을 보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이 문을 닫더라고요. 그리고 역장을 불러내 막 몰아치는 거에요. 대충 들으니 ‘딴따라’를 앉혀놓고 자기를 못 앉게 했다는 거예요. 제가 그랬지요. ‘당신 같은 이는 4년에 한 번씩 나온다. 공장에서 망치 두들기는 사람도 어떻게 하다보면 너처럼 금배지 달아. 그렇지만 구봉서 같은 사람이 되려면 40년 해도 될까 말까 해’라고 소리쳤지요.”

-요즘 정치판 보면 답답하겠다.
“누가 나하고 국회에서 정치 얘기하자고 불러주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말 다하게. 내가 다혈질이에요. 이석기·통진당 참 문제에요. 민주당은 그깟 표 의식해 감싸지 말고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해요. 이정희는 또 뭡니까, 대통령에게 박근혜씨라고 하지를 않나.”

이 말을 끝으로 구씨는 인터뷰가 힘이 드는지 ‘그만 하자’고 말했다. 구봉서씨는 “3년 전에 목욕탕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받았는데 그거 가지고 죽었다는 소문이 난 적도 있다”며 “나이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져 오니까 자료로 쓰려는지 요즘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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