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해외 유학파 여성작곡가 이영자
한국 첫 해외 유학파 여성작곡가 이영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1.29 10:10
  • 호수 3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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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10년 앞서 간 덕에 라이벌 없어 좋아요”

팔순 넘어서도 하루 10~12시간씩 작곡, 창작열 식지 않아
“내 영혼으로 쓴 음악이 사람들 가슴 아픈 곳 치유하기 바래”


국내 첫 해외 유학파 여성작곡가 이영자(83) 전 이화여대 교수는 팔순이 넘은 요즘도 밤을 새워 작곡한다. 그것도 난해하다는 현대음악이다. 지난 11월 초, 정부산하기관이 주최한 음악제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발표해 커다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현대음악 분야에 첫 여성 작곡가로서 품격 있고 수준 높은 작곡사를 기록해왔다. 이화여대 음대를 나와 프랑스 파리국립음악원 작곡과·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을 졸업했고, 파리 소르본대학 음악학 D·E·A학위(박사학위 수준)를 취득했다. 이화여대 음대 작곡과 교수(1961 ~1983)를 지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5), 3·1문화상 예술상(2009), 은관문화훈장(2012) 등 국내 크고 작은 음악상을 휩쓴 이 전 교수를 지난 11월 말, 하얏트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노년에 더 뜨거운 음악열정을 들었다.

-요즘도 작곡을 한다고.
“지금도 의뢰해온 곡들이 밀려 있어요. 이렇게 한가하게 인터뷰하러 나올 시간이 없는데….”

-최근에 만든 작품은.
“15분짜리 피아노협주곡을 만들었어요. 꼬박 6개월을 매달렸어요. 하루 10~12시간씩 앉아서 소설 쓰듯이 음표를 그려넣었어요. 그리고 나서 소리를 내보고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다시 고쳐 그리고 하면서요.”

지난 11월1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5회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에서 이 전 교수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장(章) ‘나의 조국’을 발표했다. 주최 측은 이 전 교수에게 작곡을 의뢰할 때 ‘대중 쪽으로 다가가 달라’고 주문했다. 이 전 교수는 이 말을 이해했다. 두 달 동안 밤잠을 안자고 구상하고, 넉 달 동안 퇴고를 거듭하며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연필 13자루가 몽당연필이 될 때쯤 완성됐다. 초연을 들은 주최 측의 반응은 ‘골 때리는 음악’이었다. 이 전 교수는 그 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가 맞는 말이에요. 정부기관 사람들이 음악애호가가 아닌 이상 현대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현대음악은 협화음이 아니라 안 맞는 소리에요.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싸움질, 말발굽 소리 뭐든 다 집어넣으니까요. 그게 무슨 음악이냐는 말도 나오고, 아무리 아름답게 들으려고 해도 안 되니까 골 때린다는 말이 맞아요. 그나마 이번에는 청중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써 대부분 좋았다는 반응입니다.”

-현대음악은 왜 어려운가.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시대를 따라 음악은 커다란 줄기를 타고 가는 게 있어요. 그걸 대중은 모르지요. 그걸 아는 법은 ‘12번을 들어라’는 겁니다. ‘노란샤쓰의 사나이’란 가요도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잖아요. 12번 들으세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12번을 더 들으시면 돼요.”

-현대음악과 대중음악 차이점은.
“대중음악은 세속적인 센티멘털리즘을 노래하고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 눈물을 흘리게도 만들지만 순수음악은 깊이가 달라요. 대중음악에는 철학이 없지만 순수음악 속에는 사색이 들어가 있어요. 나에게 가사만 주고 히트곡을 만들라고 하면 하룻밤에도 만들 수 있어요. 차이코프스키 ‘비창’의 경우 작곡가가 그 시대에 슬픈 게 있으니까 그걸 작곡한 후에 ‘비창’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그걸 듣는 우리들은 작곡가와 똑같이 슬픔을 느끼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그 곡을 들으면서 가을날 호젓한 길을 산책했던 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어요, 가상의 내 환상이지요. 이영자식의 사색입니다.”

-지금까지 몇 곡을 작곡했는가.
“150곡 정도 돼요.”

-어떤 평을 듣는가.
“누가 평을 해주나요. 우리나라엔 현대음악을 평가하는 음악평론가가 없어요. 같은 작곡가가 해야 가장 정확한데 누가 이영자 비판해 봐요. 가만 놔두나(웃음).”

-좋아하는 음악가는.
“바흐·베토벤·바르톡… 3비(B)에요.”

-가곡 중에 시가 많다.
“시를 가사로 해서 80여곡을 만들었어요. 앞으로 100곡을 채우는 게 꿈이에요. 고 김연준 한양대학 총장은 생전에 수천 곡을 작곡했다고 해요. 김남조(86) 시인의 작품을 특별히 좋아해 그 분 희수(77세)에 시 13편에 곡을 붙여 음악회를 열고 헌정하기도 했어요.”

-국악도 있는데.
“국악이 진짜 전통음악이지요. 우리 음악을 모르고 어떻게 음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내가 피아노를 열 살에 시작했어요. 어린 나이에 내 정체성을 모르고 서양음악부터 시작한 거지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반쪽선생’인 걸 깨달았어요. 30대에 가야금·거문고를 배우고, 어떤 국악기는 이론으로 배우고 해서 국악심포니도 작곡했어요.”

-대중음악도 듣는가.
“듣지 않아요. 나는 순수음악만 합니다. 물론 가끔 대중가요를 듣다가 가슴 뭉클한 적도 있지만 순간적이지요. TV ‘열린 음악회’를 보다가도 거부감이 나면 다른 방으로 가버립니다.”

-조용필 노래도 거부감이 드는가.
“거부감까지는요. 언젠가 친지들하고 서울시청 앞에 앉아 들은 적도 있지만 그때 뿐이지요.”
-노래방에는.
“안 가요.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어요. 친구들이 ‘가사도 있다’면서 해보라고 하지만 안 해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이 전 교수는 강원도 춘천에서 당시 춘천시 내무국장이던 이근직 씨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화여대 음대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6·25 전쟁이 발발해 춘천 집으로 피난을 떠났다. 얼마나 힘들었던 피난길이었던지 당시의 혹독한 체험이 평생 예술혼을 뿜어내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전 교수는 “내 가슴에 쇠 드럼통으로 남아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이것으로 밀쳐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힘들었는가.
“6월 25일 종로에서 책을 사가지고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당시 사감선생이던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님은 이미 피난 간 상태였고요. 학교에서 내준 쌀을 팔아 치마저고리를 사 입고 남자고무신을 신고(인민군에게 부르주아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해서) 혼자 3일 동안 걸어 춘천 집까지 찾아갔어요.”

이 전 교수의 집에는 이미 인민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직원들과 따로 피난을 갔고, 나머지 가족들은 부산으로 떠난 뒤였다. 집 근처 빈농가에 몸을 피했다. 밤에 문도 걸어잠글 수 없는 집이어서 잠도 맘 놓고 잘 수 없었다. 냄비에 피난민이 남겨두고 간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상추와 쑥갓 대를 넣고 끓여 그걸 씹으며 90여일을 연명했다. 먹지 못해 35kg까지 빠졌다. 9·28 수복 직전 아버지의 고향 김천을 찾아갈 생각으로 다시 걸어 서울로 들어왔다. 탑골공원의 한 여관을 찾아들어가 사정해 그곳에서 지냈다. 어느 날 공습으로 여관 지붕이 날아갔고, 서까래가 잠자던 이 교수에게 떨어져 머리가 찢어졌고 피가 흘렀다. 이 명예교수는 “여관주인이 이불을 하나씩 둘러쓰고 밖으로 나가라고 해서 나와 보니 길거리에 시민들 시체가 즐비해요. 요즘 국회의원들이 쌈질을 해대잖아요. 그 장면을 봐야 해요”라고 말했다. 며칠 후 서울 수복이 됐고 시청에서 아버지와 가족을 극적으로 만났다.

-작곡을 하게 된 동기는.
“집에선 ‘대학만 나오고 시집가라’고 했지만 나는 음악을 계속 하고 싶었어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중에 하늘을 향해 기도를 했어요. 내가 살아남으면 이 담에 뭘 할 것인가 하고요.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지만 밥도 못 먹고 굶는데 피아노 쳐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보다는 삶의 고비를 넘긴 순간들을 남기고 싶었어요. 음대에서 창작이라면 작곡이니까요. 내가 작곡을 하면 건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 혼이 하는 겁니다. ‘혼풀이’를 하는 거예요. 나는 처음부터 음악으로 돈을 벌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내 영혼을 쏟아내 만든 음악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가슴 아픈 이를 치유해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공부는 어렵지 않았는지.
“나는 힘든 거 몰랐어요. 공부하느라고요. 3년만에 돌아왔어요. 더 오래 했어야 했는데 집안 사정으로 일찍 들어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내무부장관에 이어 농림부장관을 지내셨어요. 4·19혁명이 나면서 당시 장관들이 다 형무소에 갔어요. 아버지도 그 바람에 암을 얻어 돌아가셨지요. 남편(한우석 전 프랑스 대사)이 외교관이라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세계 최고의 작곡가로부터 사사했어요.”

-자녀들도 음악을 하는가.
“딸 둘이 음대 교수로 피아노와 하프를 각각 전공했어요.”

-클래식음악에 심취하려면.
“쉬운 곡부터 들으세요. ‘그리운 금강산’도 클래식이에요. 베토벤 같은 고전음악도 어렵다고 하는 분들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으면 이해가 갈 겁니다.”

-경로당에 재능기부할 생각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경로당에 가서 봉사는 하고 있어요. 내가 국제존타클럽 제1지역 회장을 맡아 양로원이나 불우시설을 찾아가 밥도 해주고 그래요. 조윤선 여성가족부장관도 회원으로 같이 봉사합니다.”

이영자 전 교수는 여성작곡가회를 조직해 여성작곡가의 위상 정립과 후배 양성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여명의 여성작곡가가 있다. 이 전 교수는 “내 예술의 목적은 고탑적인 순수예술 속에 있다”며 “라이벌이 있으면 샘내고 질시하고 그러는데 나는 제일 높아 지금까지 라이벌이 없어서 좋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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