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문화사대주의’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라
정부는 ‘문화사대주의’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라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2.06 11:29
  • 호수 39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현주 기자의 취재수첩

수필가이자 ‘사진예술’ 편집장인 윤세영(57)씨는 출퇴근 길 광화문 앞을 지날 때면 서운한 감을 감추지 못한다. 광화문서부터 동아일보까지 약 500m의 세종로 길 중앙분리대에 늘어선 은행나무가 그리워서이다. 1910년에 심은 거대한 은행나무 29주는 광화문을 광화문답게 만드는 사랑스런 존재이자 서울의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4년여 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아름드리 고목들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은 ‘황금동상’과 ‘가볍고 어수선한 광장’을 만들어놓으면서 은행나무 단풍이 선사하는 아름답고 멋진 광화문 풍광은 사라져 버렸다. ‘오세훈의 광화문광장’은 2011년 건축가들이 뽑은 최악의 건축물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현대건축가 1세대인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1971년 서울 종로구 원서동 현대사옥 옆에 지은 공간사옥이 자칫 사라질 운명에 처할 뻔 했다. 건물주 ‘공간건축’이 경영이 어려워 건물을 경매에 내놓았던 것이다. 검은색 벽돌을 뒤덮은 담쟁이에서 세월의 인고를 느끼게 하는 5층짜리 자그만 건축물(연면적 108.9평)은 우리나라 현대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공옥진의 병신춤 공연, 사물놀이 김덕수놀이패의 첫 공연 등 문화계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겠다고 했고, 아라리오갤러리 측에서 건물을 사들여 문화예술의 명맥을 잇는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키겠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서울 흥인지문에서 낙산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바지에 동대문교회 본당 건물과 ㄱ자형 작은 기와집이 있다. 이 교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 120여년 전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남녀합동예배가 열렸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해 설교도 휘장 막을 가리고 하던 때였다. 동대문교회는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가 1887년 세운 국내 첫 여성병원 동대문부인진료소에서 출발했다. 1892년 윌리엄 홀 선교사 부부가 이 교회에서 한국 처음으로 서양식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곳 병원에서 낳은 부부의 아들 셔우드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퇴치에 앞장섰다. ‘한양도성’의 세계유산등재를 추진 중인 서울시가 교회건물들을 허물고 공원을 지으려고 해 문화계 원성을 사고 있다. 세계유산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또 다른 ‘문화사대주의’ 발상이다. 어디 이 뿐이랴. 양정모(레슬링), 차범근(축구), 현정화(탁구) 등 한국 스포츠스타의 산실 태릉선수촌도 철거 위기에 놓였다. 체육계는 “선수촌은 한국 현대스포츠 발전의 상징이다. 철거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정부는 이 말을 똑똑히 상기해야 한다. 문화사대주의에 빠져 유구한 근대건축물을 거리낌 없이 부수고, 유서 깊은 세종로 길을 난잡한 시장 통으로 둔갑시켜놓는 일 따위를 당장 멈춰야 한다.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원래 기차역이었던 오르세미술관도 처음엔 철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미술관으로 업종 변경해 요즘은 관광객 수백만명이 다녀가는 명소가 됐다.
과거 우리는 중국·일본 등이 국보급 문화재를 불태우고 빼앗아 가는 걸 속절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시 만들 수도 없는 근대건축물을 제 손으로 허물려고 한다. 근대건축물 하나하나가 우리의 역사이자 유산이다. 파괴할 권리가 없으며 보존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후손들에게 사적지 표시판만 달랑 남기는 무책임한 문화정책을 당장 시정하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