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시선’은 제 인생 건 진짜 데뷔작”
“영화‘시선’은 제 인생 건 진짜 데뷔작”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4.04 17:26
  • 호수 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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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종교영화 찍은 이장호 감독
▲ 이장호 감독은 뒤늦게 신앙심을 회복하고 4년 전 장로가 됐다. 사진=임근재

영화‘Y의 체험’이후 만드는 영화마다 실패
51세에 늦둥이 얻고 신앙심 회복, 새 삶 얻어

 

“27년간 하나님이 저를 광야로 내몬 건 이 영화를 만들라는 계시나 다름없습니다.”
지난 3월31일 저녁 8시, 대한극장에서 있은 영화 ‘시선’의 시사회에서 이장호(69)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오랜 칩거 끝에 종교영화를 들고 대중 앞에 섰다. 이날 시사회에는 지인들과 종교계 인사 400여명이 참석했다. 영화는 이슬람국가에 단기선교를 간 교인들이 무장반군에 붙잡혀 선교와 배교(背敎·믿던 종교를 배반함)를 택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갈등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이 감독은 수년 전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고 감동받았다. 소설은 일본 개화기에 악덕영주에게 붙잡혀 배교를 강요당하는 포르투갈 선교사의 고뇌와 구원의 과정을 그렸다.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사건(2007)도 참고가 됐다. 영화는 정부의 지원금으로 만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해외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감독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심사를 해 제작비를 지원해준 것이다. 이 감독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칼리가리 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지원금을 받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행정소송에 휘말렸고, 시나리오도 다시 썼어요. 되돌아보면 제대로 된 영화를 완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해요.”
종교적 색채가 강해 비종교인은 낯을 가릴 수 있겠지만 이 감독은 “감동이 클 것이다”며 낙관했다. 실제로 신앙인이 아닌 강우석 감독도 영화를 본 후 “감명 깊다”며 선뜻 배급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 감독은 “이번 영화는 과거 작품들과 확연히 선을 긋는다”고 했다.
“내 영화뿐만 아니라 역대 영화-오락영화라든지 인본주의적 영화들까지-의 시각이 사람의 시각이고 그건 자칫 악마의 시각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영화는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밖에 안 되지요. 영혼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라는 건 하나님의 바람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의 데뷔작이나 다름없어요.”
이 감독에게 그동안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 그는 29세에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으로 돈과 명예,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 쥐었다. 국도극장 한 곳에서 한 달여 만에 46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그 이전까지는 열등감에 쌓인 자포자기적 삶이었다. 영화를 하게 된 것도 영화검열관인 아버지가 “차라리 영화판에나 가라”고 해서였다.
“처음에 신상옥 감독 밑에서 일했어요. 주변에 예쁜 여배우들이 있고 감독님은 하늘 높은 분처럼 보여 주눅 들고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걸 회복하는 순간이 바로 ‘별들의 고향’이었지요.”
유명해지자 내부에서 열등감이 슬며시 사라지고 우월감이 생겼다. 나중엔 특권의식까지 생기더니 오만방자했다. 문공부장관을 만나러 가는데 반바지를 입고 가기도 했다.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4년 동안 활동 정지를 당하면서 밑바닥까지 갔다. 집도 팔고 자동차도 팔고 천호동 월세 집으로 밀려났다. 남이 만든 영화 시사회나 보러 다니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한다. 한국영화가 현실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화려한 무대만 찍는다는 걸 깨달았다. 1970년대 군사정권 하에서 손대지 못했던 빈곤과 부정부패를 주목했고, 그래서 만든 작품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다. 상경한 청년 셋의 고단한 서울살이를 다루었다. 한국의 리얼리즘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 감독이 되겠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을 찍을 때는 방탕했다. ‘Y의 체험’(1987) 이후에는 만드는 영화마다 실패였다. 이 기간을 ‘광야의 시련’이라고 했다. 대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 신앙심을 회복했고 새벽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 4년 전 장로가 됐다.
“51세에 늦둥이를 낳았고 이 아이를 성직자를 만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어요. 그 다음부터 방탕한 생활이 정리가 되고 신앙도 달라졌어요.”
대중 앞에 서는 대신 강단에서 후학을 길렀다.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부학장,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사)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회장을 하고 있다.
‘시선’을 본 지인들로부터 대박을 기원한다는 말을 들으면 썰렁하기까지 하다고. 이 감독은 “미국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는 ‘벼락흥행’은 없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영화가 상영돼 지금까지 3000만명이 영화를 보았다”며 “영화를 보고 많은 이들이 기도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객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종교영화를 만들겠다는 이 감독에게 좋은 감독을 정의해달라고 했다.
“관객을 인질로 잡아놓고 시간 죽이기를 한다면 돈 벌려는 장사꾼에 불과해요. 관객들로 하여금 삶을 깨닫게 한다든가, 인문적 소양을 높여준다든가 해야지요. 자기보다 관객을 먼저 생각하는 감독이어야 합니다.”
이장호 감독은 대종상영화제 감독상(낮은 데로 임하소서)과 백상예술대상 작품상(바람 불어 좋은 날)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감독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 중 그의 작품 3편이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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