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아버지와 사별 후 화해하기까지
가정폭력 아버지와 사별 후 화해하기까지
  • 이다솜 기자
  • 승인 2014.04.14 09:25
  • 호수 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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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진으로, 홍재희 감독이 어린 시절 아버지 故홍성섭씨와 남산 잔디밭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사진=(주)인디스토리 제공

숨 거두기 1년 전부터 딸에게 보낸 43통의 이메일
술주정·폭력 일삼던 아버지의 삶 처음으로 돌아보게 돼
홍재희 감독, 장편데뷔작에 자신의 가족 이야기 녹여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를 용서해본 적이 있는가. 4월 23일 개봉하는 홍재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은 홍 감독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들이 고인이 된 아버지 홍성섭씨를 이해하고 용서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물론 아직까지 그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홍 감독이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그의 남동생 홍준용씨뿐이지만…. 언니 홍주희씨는 여전히 아버지를 떠올리기조차 싫어하고 어머니 김경순씨는 “술이 문제였지 착한 사람이였다”고 간신히 말할 수 있게 된 정도다. 그만큼 홍성섭씨는 가족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 트라우마를 남긴 존재였다.
영화는, 아버지가 일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둘째 딸인 홍 감독에게 보낸 43통의 메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메일에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첫 번째 메일에는 함경도 출신인 열네 살의 홍성섭씨가 죽을 각오로 3·8선을 넘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이어지는 다음 메일에서 그는 연재하듯 삶의 질곡을 써내려갔다.
홍씨는 6·25전쟁이 끝나고 미군부대에서 파지 장사를 해 큰돈을 벌었지만 사기를 당해 돈을 몽땅 날린 후에는 평생 돈에 집착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독 광부를 자청하고, 기술자로 베트남 전쟁에 파견됐다. 중동 건설 붐이 일던 시기에는 사우디에 가서 뜨거운 모래바람을 견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귀국 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십여 년을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트럭 운전수가 된 후에는 사고를 내고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삶의 끝에는 경비원이 돼 소일하며 서울 금호동 재개발에 저항하다 삶을 마쳤다.
홍씨가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은 알코올 중독으로 칩거할 무렵. 그는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툭하면 아내 김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또, 삼남매를 불러 앉혀 놓고 탈북 과정에 대해 끝도 없이 반복하는 등 술주정을 했다. 가족들에게 그는 무기력한 동시에 두렵고 버거운 존재였다.
홍씨가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난 2011년 제작된 이 영화는 아내 김씨와 그의 자녀들, 친척, 지인 등의 인터뷰와 홍씨의 이메일을 토대로 만든 재현 극을 교차해 엮어냈다. 장편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현재, 다큐멘터리-극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어 호평받았다. 제38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한 최우수작품상도 이를 입증한다.
홍 감독은 아버지의 이메일에 대한 뒤늦은 답장이기도 한 이 작품을 만들며 아버지를 용서했다. 아버지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구태여 가족들이 묻지도 않았던 그의 삶의 궤적을 쫓으며 아버지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한 때 꿈이 있었다는 것, 연좌제라는 폐단으로 그 꿈이 좌절된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책망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 한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이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며 가족사이기도 하다. 이는 홍씨가 6·25전쟁, 월남전, 88올림픽, 아파트 재개발 등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시기를 거쳐 온 데다 그로부터 가족들이 받은 고통은 가정폭력에 노출됐던 적지 않은 이들에게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하면서도 비극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 냉철함을 유지하려는 홍 감독의 노력은 오히려 따스한 시선으로 영화에 녹아있다. 각종 영화제를 통해 영화를 먼저 접한 관객들이 이 작품을 ‘치유의 영화’라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인 지도 모른다.
다음은 4월 7일 서울 롯데시네마 애비뉴엘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홍 감독의 답변.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게 된 계기는.
“‘한 번도 나는 꼭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 ‘나는 다큐감독이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전에 극영화를 했었고 시나리오 작업하는 걸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메일을 보고 다큐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찾아 뵀더니 “너는 영화한답시고 몇 년째 이렇게 살고 있는데 뭘 먹고 사냐”면서 지나가는 식으로 “그렇게 할 거면 차라리 나를 찍어 봐라”하고 말한 적은 있다. 사실 아버지의 이메일을 바탕으로 극영화를 찍는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허구로 포장하는 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진 않았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걸 찍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하고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제 스스로는 아버지와 화해했고 용서한 것 같다. 아버지를 용서했다기보다 그 시기를 버텨야했던 어린 나를 용서한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사실 지금도 용서가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성인이 됐고 상처받고 무기력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볼 만큼 성숙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증오했었다’는 내레이션도 당시의 나는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메일을 보냈던 1년 동안 확인이나 답장은 했는지.
“첫 메일이 3·8선을 넘는 얘기였는데 처음 듣는 얘기고 워낙 생생해서 재밌게 읽었다. 그러나 뒤로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넋두리하듯 써내려가서 읽고 싶지가 않았다. 특히 어느 구석에도 어머니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게 짜증났다. 그래서 읽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왜 메일을 읽지 않냐고 하시더라. (웃음) 꾸준히 읽고 형식적인 답장만 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아버지 이러시면 안된다’고 훈계조로 답장을 했는데, 후회된다.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서….”

-영화를 본 어머니의 반응은.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셨는데, 사람들과 자신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이 어머니에게 치유의 과정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는 편안해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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