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행 콩쿠르’때 경남 양산에 연주자 400명이 모여요
‘엄정행 콩쿠르’때 경남 양산에 연주자 400명이 모여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4.25 11:44
  • 호수 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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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화’로 유명한 성악가 엄정행

음악교사 부친 유지 받들려 6년 전 정년퇴임 후 고향서 후배 양성
2007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회복… 요즘도 한 달에 2~3회 공연


젊었을 적에는 사회에 기여하고 나이 들어선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주민을 위해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사는 이의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목련화’를 기막히게 잘 부르는 성악가 엄정행(71) 경희대 명예교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엄 명예교수는 지난 2008년 경희대를 정년퇴임하고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 ‘연우엄정행음악연구소’를 열었다. ‘연우’는 연주를 하는 친구란 뜻이다. 지역 여성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이끌며 아픈 이와 노인을 위한 위로공연을 펼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엄정행콩쿠르’를 개최해 미래의 재능 있는 음악가를 발굴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현역 때만큼 바쁘게 보낸다는 엄 명예교수는 요즘 공사로 땀을 흘리고 있다.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목재도 자르고 전선도 잇고 벽돌도 쌓는다.

-무슨 공사인가.
“최근에 양산 출신 연주자를 모아 양산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했어요. 첼로 같은 악기들은 면적을 많이 차지해요. 현재 연습장은 비좁아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어요.”

-왜 직접 하나.
“당연히 경비 때문이지요. 사람을 부르면 그게 다 돈이니까요. 어젯밤에도 밤 10시까지 방음에 쓰는 회벽돌을 쌓았어요.”

엄 명예교수는 지역 문화예술 저변 확대를 위해 서울·부산·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3월에 부산 금정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0월에 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창단기념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엄정행음악연구소는 양산시 북부동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의 4층(100평)을 빌려 쓰고 있다.

-양산 출신 연주자가 그렇게 많은가.
“그럼요. 네덜란드·러시아에 유학 다녀온 이들도 있어요. 양산 인구가 30만 정도에요.”

-‘엄정행콩쿠르’는 자리를 잡았는지.
“올해 13회째입니다. 고향에 내려오기 전부터 개최해왔어요. 처음엔 고전을 했지만 이제는 전국에 많이 알려졌어요. 대회 날 양산에 연주자 300명, 반주자 100명 등 약 400명이 모입니다. 굉장하죠. 올해는 6월에 합니다. 대상 상금 700만원, 금상(남·녀 일반 부문)은 200만원씩이고 총 상금은 1800만원이에요. 여느 콩쿠르와 비교해 적지 않아요.”

-합창단은 어떤 이들로 구성됐나.
“양산 지역 여성 40명으로, 가장 나이 많은 분이 60대 후반이에요. 최근까지 연구소에서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주어오다 중단하고 그 돈을 운영자금으로 해 통도사 입구에 있는 노인요양병원 ‘자비원’을 비롯해 부산과 양산의 병원 등에 공연을 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귀향하게 됐나.
“아버님 영향이 커요. 시골에서 교육장, 교장선생을 지낸 아버님이 정년 되던 해 ‘뭘 할까’ 고민하셨어요. (아버님이) 음악을 전공했으니 합창단도 만들고 도서관도 열까 궁리하시다 퇴임 후 6개월 만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스트레스가 심했나 봅니다. 나 역시 경희대에서 정년퇴임 3년 전, 아버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다 아버님이 못 이룬 걸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겁니다.”

-연구소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럼요, 단원들이 한 번 모이면 70여명 됩니다. 이들이 커피 한잔씩만 마셔도 얼마겠어요. 한 번 콩쿠르 개최하는데 드는 비용이 5000만원이에요. 양산시에서 3000만원을 지원해주고 사비가 2200만원씩 들어요. 참가비도 도움은 되지요. 피아노콩쿠르 경우는 대회 한 번 열면 돈이 남는다지만 성악은 사정이 그렇지 못해요.”

-어떻게 감당하는가.
“교수생활하면서 모아둔 걸로 메우고, 공연도 계속 하니까요. 물론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이름을 걸고 시작한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고,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간다는 각오로 계속 할 생각입니다.”

-어려운 점이라면.
“공정한 심사를 한다 해도 학부모들 입장에선 불만이 있는 것 같아요. 가령 ‘자기 아이가 다른데서는 대상을 받았는데 여기선 왜 일등을 하지 못 하나’라는 말을 해요. 그런 것만 없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어요. 우리는 음대 교수님들이 심사를 해요. 제 이름을 걸고 하는 대회인데 허술하게 하겠어요.”

테너 엄정행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고향에서 마쳤다. 부산 동래고, 경희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원래의 꿈은 운동선수였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배구경기가 9인제에서 6인제로 바뀌며 운명을 갈랐다. 173cm의 키로는 180cm가 넘는 장신들을 따라잡기가 무리였다. 아버지 권유로 성악으로 선회했다. 엄 명예교수는 “정경화도 악기(바이올린)가 좋지 않다면 좋은 음악이 안 나온다”며 “내 경우는 부모로부터 좋은 악기(목소리)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엄 명예교수는 1968년 명동국립극장에서 처음 독창회를 열었다. 이후 ‘목련화’ ‘비목’ 등을 불러 가곡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목련화’는 그에게 ‘국민 성악가’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올해도‘목련화’를 불렀겠다.
“올해는 강원도 동해문화예술회관에서 불렀어요. 한창 때는 한달에 25~30회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목련화를 불렀어요.”

-그 노래는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경희대 시계탑 옆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목련나무가 있어요. 그걸 보고 당시 경희대 조영식 총장님이 가사를 지었고 김동진 선생님(1913~2009)이 작곡을 했어요. 가곡이 아니라 경희대 역사 사반세기 칸타타 중 2악장에 있는 아리아였어요. 그걸 방송국에서 녹음테이프로 틀다 시청자 반응이 좋으니까 스테레오 LP판으로 제작했고 대중화가 된 겁니다.”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라면.
“김동진 선생님이 하루는 저를 불러 악보를 주시며 불러보라고 했어요. 야단맞으며 60번이나 불렀어요. 당시만 해도 젊었고 연주경력이 그리 많지 못한 탓에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를 못했나 봐요.”

-돈도 많이 벌었겠다.
“남들보다 무대에 많이 서 월급 외 수입이 좀 있었어요. 삼성전자 제품 CF도 나갔고요. 그 제품도 다 팔렸다고 해요.”

엄 명예교수는 서울과 양산에 집을 각각 두고 있다. 서울 신도림동 아파트에는 부부만 지낸다. 남매 중 딸은 음악을 전공했다. 아들은 음악과 무관한 정부산하기관에 나가고 있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부인은 성악을 전공했지만 결혼하면서 음악을 접었다. 박인수·박성원·윤치호 등이 동기이다. 엄 명예교수는 대학원 시절 결혼했다. 신혼 초 공부를 병행해야 해 생활이 무척 어려웠다. 5년 동안 옷장사, 커피장사, 악기장사 등을 하기도 했다. 청주여자사범대 전임강사를 거쳐 모교 경희대에 부임한 이후로 생활이 펴졌다.
엄 명예교수는 MBC FM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를 10년 진행했다. 독창회 190회, 오페라 ‘토스카’·‘나비부인’ 등 국내외 공연 1500여회 출연. 레코드 20집, CD 9집 발간. 성악가가 주는 세일한국가곡상(2010)·양산문화시민대상(2012) 외 많은 음악상을 받았다. 엄 명예교수는 수~금요일까지 양산에 머물고 주말엔 서울로 올라온다.

-꽤 오래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는데.
“내가 유학을 못 갔어요. 음악 프로를 진행하면서 하루 3시간씩 국내외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듣는 것도 공부니까요. 성악곡에 대한 국민적 관심사가 커진 계기도 됐고요. 1970년대 초 발표한 ‘테너 엄정행 한국가곡집’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그 판에 장일남 선생의 ‘비목’도 들어있어요.”

-한때 노래를 못 부른다는 소문도 들렸다.
“2007년에 쓰러졌어요. 너무 무리를 한 거지요. 수업은 수업대로 하면서 매달 7,8회 씩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했으니까요. 두통이 계속됐지만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어요. 나중엔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눈 주위에 퍼런 멍까지 들더라고요.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어요. 입원한 다음날은 잘 걷지도 못하고 말까지 어눌해졌어요. 의사는 언어장애가 올 확률이 99%라고 했어요. 사흘쯤 지나 좀 나아지는 듯 해 3개월 입원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어요.”

-목소리에 변화는 없었나.
“솔직히 처음에는 노래를 못 부르는 건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퇴원 후 두 달 정도 쉬니까 목소리가 아프기 전 보다 더 좋아지더라고요. 정년퇴직한 해에만 데뷔 40주년 독창회 등 연주회를 10차례나 했어요.”

-고향의 노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고향 친구들 대여섯명하고 가깝게 지냅니다. 노후엔 돈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몸과 소일거리가 있어야 해요. 움직이지 못하면 대화도 단절되고 가족들하고도 멀어집니다. 내 친구들도 하는 일이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요. 노인들에게 일거리가 있으면 좋겠어요. 가령 고향의 환경을 좋게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노인이 움직일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엄정행 명예교수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오전 8시30분부터 밤10시까지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인다. 요즘도 한 달 2~3회 전국 공연을 거뜬히 소화한다. 엄 명예교수는 “음악도 운동도 모두 인내를 필요로 한다”며 “운동을 안했더라면 음악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엄 명예교수는 40여년 음악활동을 하며 악보, 포스터, 비디오테이프 등 관련 자료를 모았다.
엄 명예교수는 “이것들을 한 자리에 전시해놓아 누구든지 와서 악보를 쉽게 찾아보고 복사도 하고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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