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무대’가 어르신들 낙이라면 그만 본다고 할 때까지 할 생각
‘가요무대’가 어르신들 낙이라면 그만 본다고 할 때까지 할 생각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5.23 11:13
  • 호수 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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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현역’김동건 아나운서

방송 경력 51년째 외길 달려 온 아나운서…“하늘이 내려준 복”
‘낭만논객’… 김동길·조영남 등과 재밌는 조합, 즐겁게 하고 있어


50년 넘게 방송을 하고 있고, 피난 와서 이사를 딱 두 번했으며, 스마트폰이 아닌 2G 핸드폰을 쓰는 70대 방송인, 아나운서 김동건(76)씨이다. 그는 “방송을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다행히 프로그램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모두 하늘이 나에게 준 복이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나이 많은 현역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그의 선배 중에도 그 같은 기록은 없었다.
지난해 후배 아나운서들이 그의 방송 50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씨는 그 행사에서 “한 해 한 해 하다 보니 이렇게 됐지 50년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대과없이 하다 보니 건강이나 운이 좋아 여기까지 왔다”며 “아나운서가 큰 권력이 있든가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면 50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5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커피숍에서 김씨와 마주 앉았다.

-요즘‘가요무대’를 볼 수 없는데.
“세월호 사고 이후 가요무대가 5,6회 쉬고 있어요. 이미자 씨의 가수 데뷔 55주년 기념공연 사회도 맡기로 했지만 취소했어요.”

-이미자 씨는 자기 공연 스케줄을 김동건 씨에게 맞출 정도라는데….
“가요무대를 못하는 상황에서 그걸 한다는 게 어렵지 않겠어요. 이미자씨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내가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을 맡고 있어요. 후배아나운서들에게 5월 한달 동안 골프하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공연의 사회도 삼가라고 말했는데 내가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를 보았는지.
“그걸 보고 나도 많이 울었어요. 박 대통령은 담화 처음부터 눈물을 참는 거 같았어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어요. 끝부분에 의사자 이름을 한 명씩 부를 때 참았던 눈물이 터진 것 같았어요.”

-박 대통령과 인연이라면?
“육영수 여사가 한번은 청와대로 초대를 해 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내 방송을 보고 좋다면서 사람을 통해 선물을 전해준 일을 고맙게 기억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여년 전 방송에 출연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내가 당시 맡았던 프로 ‘11시에 만납시다’에 초대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지요. 내가 ‘정치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고요. 그때는 평범한 신분이었지요. 후배 아나운서 교육할 때 가장 말을 쉽고 명료하게 하는 정치인이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말을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지 않았는지.
“아유, 나처럼 자유분방한 사람을 누가 불러주나요.”

김동건 아나운서 하면 ‘가요무대’이다. 노무현 정부 때 타의에 의해 7년 동안 자리를 비운 걸 제외하곤 1985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그간 에피소드도 많다. 한 방청객은 수년 동안 김씨에게 껌을 선물하기도 했다. 가요무대 방청을 원하는 시청자들이 방송국에 줄을 섰다. 김씨의 어머니도 가보고 싶어 했지만 아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가 된다고 했다.

-요즘도 껌 주는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있는가.
“요즘은 사진 찍자는 분들이 많아요. 스마트폰이 생기고 나서 어떨 때는 1시간 동안 찍어야 해요. 그게 귀찮지 않아요. 내 방송을 보며 같이 나이가 든 분들이지요. 지방에서 올라온 그분들이 사진 찍자고 했을 때 귀찮게 생각하면 안되지요.”

-프로가 없어진다는 말도 들었다.
“프로를 없애는 게 아니고 방영시간을 줄인다고 했던 겁니다. 대한노인회에서 난리가 났어요. 이 심 회장님이 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어요. 노인회에선 90분을 해달라고 했어요. 결국 KBS에서 시간을 5분 늘리는 것으로 타협을 봤어요.”

-에피소드라면?
“파독 광부 30주년 때하고, 작년 50주년 때 두 차례 독일 공연을 했어요. 브라질 이민 30주년 기념 공연도 현지에서 했지요. 독일 공연 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느냐면 ‘가수들은 늘 보는 얼굴이니까 현지 교포들의 얼굴을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럴 정도로 눈물바다였지요. 한 번은 가요무대에서 보훈의 달을 앞두고 전쟁미망인을 인터뷰 했어요. 부인이 기름종이에 뭔가를 싸가지고 왔어요. ‘뭘 보여줄게 있느냐’고 묻자 미망인이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거라며 종이에 싼 걸 풀었어요. 줄이 달려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회중시계였어요. 유리는 깨져서 금이 가 있고, 시계바늘은 멈춰있었어요. 그걸 보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겁니다. 내가 겉으로는 미소를 띄며 뭐라고 말을 했지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어떤 마음으로 방송을 하는가.
“30년 가까이 하는 동안 항상 ‘멀리 계시는 해외동포 여러분, 해외근로자 여러분. 지난 한 주 평안하셨겠지요’란 인사를 합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옛날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외국 동포가 그 말 한 마디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언제까지 할 건가.
“대한민국의 오늘이 허술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60~80대 어르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결과입니다. 이분들이 그만 봐도 좋다고 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부분 노인들의 생활이 어렵다.
“노인 자살률 1위, 독거노인, 황혼이혼이 는다는 말 들으면 안타까워요. 기초연금 20만원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도 안돼요. 그나마 다 준다니 깎는다느니 하면서 질질 끌어왔지요. 어린이에 대한 정부 지원은 잘 돼 있지만 부모도 없고 자식도 도와주지 않는 독거노인에 대한 복지가 안 돼 있는 건 이해가 안가요. 선진외국처럼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자원봉사자를 많이 활용해 어르신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돼야 해요.”

-CF에 나오는 걸 못 봤다.
“딱 한 번 20년 전 쌍용제지 제품에 나갔어요. 그 회사 사장이 친구인 관계로 나가게 됐지요. 모델료 전액은 연세대에 장학금으로 갖다줬어요.”

가요무대는 드라마와 같은 시간대에 물려있지만 시청률이 항상 10%대이며, 높을 때는 14~16%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김씨는 “그건 참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황해도 사리원 출신의 김동건 아나운서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아나운서가 되기를 원했다. 1963년 3월, 연세대 재학 중 동아방송 수습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 동양방송(TBC)과 KBS를 거쳤다. 그가 맡았던 프로는 수백개나 된다. 김씨는 “그 중 어느 것 하나 애착이 가지 않은 프로가 없다”고 말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이산가족찾기, 수해방송, 북한특별공연 등 KBS의 특별 생방송 진행자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 토크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11시에 만납시다’를 10년 간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 ‘가요무대’(KBS)와 ‘낭만논객’(TV조선) 두 곳에 출연하고 있다.

-아나운서의 조건이라면.
“아나운서 자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요즘은 얼굴을 보지만 아나운서는 얼굴로 승부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인간성을 가져야 해요. 여러 사람이 TV로 보면 다 압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을 말이지요. 그렇다고 내가 인간성이 좋아 오래 한 건 아니고요. 그저 보통사람이지요. 기본적인 발음과 억양, 목소리 등은 타고 나야 해요. 안 되는 발음이 없어야 하고요.”

-어떤 노력을 했나.
“아마 남들보다 몇배는 노력했다고 봐요. 되기 전에도 했고 후에도 연습을 많이 했어요. 내가 할 때는 뉴스가 기본이었어요. 하루치 뉴스 원고를 회사에서 빌려다 집에서 2,3시간 낭독했어요. 녹음을 하고 그걸 다시 들어보고 하면서요. 힘들고 진이 빠지는 과정이에요. 2년을 했어요.”

-‘낭만논객’이후 변화라면.
“사람들이 나를 다시 봅니다. 재미있다고 해요. 아는 게 많다는 말도 하지만 그거 다 작가들이 적어줘서 하는 거지 알긴 내가 얼마나 알겠어요.”

-출연진 세명의 호흡이 잘 맞는다.
“여러 곳의 종편에서 출연제의가 왔지만 응하지 않다가 친분 있는 TV조선 관계자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김동길 박사님은 내가 연세대 입학 때부터 현재까지 57년 동안 멘토로 모시는 분이세요. 박사님에게 함께 프로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리자 박사님은 ‘네가 하자면 하겠다’고 쾌히 승낙하셨어요. 처음에는 둘이 하기로 했다가 방송국 측의 제의로 조영남씨가 합류했지요. 재밌는 조합이에요.”
-김동길 박사의 구수하고 해박한 지식에 새삼 놀란다.
“그분이 강연을 많이 하세요. 수백명 모아놓고 강연하는 것보다는 수만명, 수백만명에게 해박한 지식과 삶의 경험을 들려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제도 ‘낭만논객’ 녹화를 했어요. 학생 100여명을 스튜디오에 모아놓고 ‘청춘’을 주제로 진행했는데 김 박사님이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를 영어와 우리말로 줄줄 낭송하셨어요. 영시, 한시, 시조, 시 등 300수를 암송하십니다. 대단하신 분이에요. 오래 동안 명석한 두뇌와 건강을 유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영남씨가 가끔 오버한다.
“밖에서 조영남씨와는 친형제처럼 지내요. 조영남씨가 ‘럭비공’처럼 여기저기 받고 나한테 기어오르고 그러지만 잘 하고 있는 겁니다. 조영남씨가 김동길 박사님하고 학문을 논하겠어요? 그렇지만 가릴 때는 가립니다. 어제 차에서 내리면서 조영남씨가 김 박사님 어깨를 손으로 치면서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러는 거예요. 내가 정색을 하고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그러느냐’고 야단쳤어요. 그래도 그 나이에, 조영남씨도 70대입니다, 체면 가리지 않고 분위기를 재밌게 끌어주는 점은 고마운 거지요.”

김동건 아나운서는 남매를 두었다. 딸은 출가했고, 아내와 40대 아들과 함께 서울 옥수동 하이츠아파트에 산다. 피난 온 후 서울 관철동, 한남동에 살다 현재의 집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다. ‘백세시대’와의 인터뷰는 1년여 설득한 끝에 겨우 성사된 것이다. 지난해 ‘백세시대’ 전신인 노년시대신문으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당시 “나는 노년이 아니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번 만남에 준비해간 ‘백세시대’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인터뷰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엔 이런 신문이 필요하다”고 한 후 “그렇지만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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