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강릉 토박이 어르신에게 사투리 채집해요
94세 강릉 토박이 어르신에게 사투리 채집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5.23 13:57
  • 호수 42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종문화상’수상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

강릉방언사전 펴내는 작업 5년째 해 와
야생화 찍어‘백세시대’꽃사진 연재


미국의 뉴욕타임스(NYT)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신문으로 인정받는 이유 중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빌 게이츠, 안젤리나 졸리 같은 유명 인사들의 기고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백세시대’의 필진 가운데 지면을 빛내주는 인사가 많다. 이 신문의 인기 연재물 ‘나를 물들게 하는 시와 꽃’의 필자 이익섭(76·사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5월1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는 제33회 세종문화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재즈가수 나윤선(예술 부문)과 KBS 아나운서실(한국문화 부문) 등이 나란히 이 상을 받았다. 이 상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고 창조정신을 계승하고자 1982년에 제정됐다. 상금은 3000만원.
이 명예교수의 수상 이유는 현대국어 학문문법의 체계를 수립하였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문법개설서인 ‘한국의 언어’(1997)를 세계 각국의 언어로 출판해 한국어 문법을 학문적, 교육적으로 세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
“‘한국의 언어’란 책은 미국의 고급 독자들에게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언어·역사·미술 등 분야 별로 만든 책 가운데 하나였어요. 한글의 구조, 우수성, 창제 경위 등을 담았어요. 러시아판은 우리나라 목사가 번역했어요.”
중국·일본·독일·터키 등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공산권 국가는 북한을 통해 한글을 접한 탓에 평양사투리 일색이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공산권에서도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명예교수는 ‘방언 연구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5년 전부터 강원도 사투리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쉼 없이 해오고 있다. ‘강릉방언자료사전’은 10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에 수록 단어만 1만개에 이른다. 새로운 사투리가 자꾸 채집돼 발간이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강릉만의 재밌는 사투리가 많아요. 얼금·낮빔·배그눌 등이 그것입니다.”
‘얼금’은 날이 추워 곡식 작물이 얼었을 경우를 말한다. “꽃이 얼금해서 열매가 안 열리겠네” 식이다. ‘낮빔’은 비가 오다 잠깐 멈춘 경우에 쓴다. 강릉 사람들은 “오늘은 비가 오다가 낮빔도 안하네”라는 말을 한다. 즉, 비가 쉬지 않고 온다는 뜻이다. ‘배그눌’은 서로 마주보고 그네를 타는 걸 말한다.
강릉만의 특이한 풍속도 소개하고 있다. 냄새나는 노래기와 관련된 일종의 주술적 행위도 흥미롭다. 그해 처음 천둥 치는 날 돌을 뒤집어 던지며 “노낙각시 벼락치라”고 하면 노래기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믿는다. 노낙각시는 노래기를 칭한다.
이 명예교수는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 지재마을에서 태어났다. 파초 김동환과 허난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명예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동대학원을 졸업했다. 34년 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 후 정년퇴임했다. 국어학회 회장, 국립국어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 명예교수는 요즘도 한 달에 한번 강릉을 찾는다. 94세 토박이 노인 등을 상대로 사투리를 채집한 후 서울로 올라와 정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세종문화상 상금 중 일부를 이들어르신들에게 사례비조로 드릴 수 있게 돼 기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릴 적 기분 좋게 들었던 사투리 중에 ‘오랍돌이’가 있어요. 집 울타리와 근방을 뜻하는 단어이지요. 가령 ‘할아버지가 오랍돌이에 가셨다’는 말은 집에서 겨우 한두 집 떨어진 장소에 갔다는 말입니다.”
이 명예교수는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는 취미를 갖고 있다. 영문학의 대가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명렬 서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산행을 하며 꽃 사진을 찍는다. 이 명예교수 등은 자신들이 찍은 꽃 사진에 김창진 전 가톨릭대 교수의 시를 붙여 ‘오늘은 자주조희풀 네가 날 물들게 한다’(2013)는 들꽃시집을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명예교수는 꽃 사진을 찍다 아찔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돌무더기가 우르르 무너져 내려 함께 쓸려내려가며 다리 위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들에 정강이뼈를 다쳐 몇 주일이나 치료를 받은 적도 있고, 벌집을 건드려 혼쭐이 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산행은 변함없다.
“새로운 사투리를 발견하면 숲속에서 야생화를 처음 만난 듯 희열을 느껴요. 사투리를 연구하면서 언어의 숲은 끝이 없다는 걸 느낍니다. 꽃에 비유하자면 그 전에는 ‘화단의 꽃’만 알았다고 할까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다향/김복진 2014-05-28 13:15:47
선생님!
열정을 손수 보여주시며 생활하시는 모습에
늘 감명입니다.
세종문화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