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가수들도 나에게 잘 보이려 고분고분 했어요
톱 가수들도 나에게 잘 보이려 고분고분 했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5.30 14:59
  • 호수 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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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령 녹음기사 이 청
▲ 이 청 대표가 LP커팅 기계 앞에서 LP판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계는 국내에 한 대만 남아있다.

전국 교회 합창단 스튜디오에서 찬송가 600곡 녹음 기억에 생생
LP부터 카세트, CD까지 우리나라 50년 음향산업 발달 이끌어


“나훈아씨는 신인인데도 감정이 풍부했어요.”
국내 최고령 녹음기사 이 청(75) 유니버셜레코딩스튜디오 대표는 신인 시절 나훈아의 노래 대부분을 녹음해주었다. 이 대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LP 커팅 기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국내 최고 수준의 LP 커팅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LP 커팅이란 LP판에 ‘소리골’을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LP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장을 형성하는 홈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소리골’이다.
현재 이 대표가 소유한 커팅 기계는 1970년 독일 ‘노이만’사 것으로 당시 수입가격만 24만 달러(한화 약 2억5000만원)에 달했다. LP판이 CD에 밀려나면서 커팅 기계들도 따라서 고철로 팔려나가 현재 국내에는 이 대표의 스튜디오 한곳에만 남아 있다.
최근 일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아날로그에 대한 복고열풍이 불면서 LP판을 내는 가수들도 늘고 있다. LP판을 내려면 반드시 이 대표의 손을 거쳐야 한다.
“LP에서 CD로 바뀌면서 일거리가 거의 없다가 2년여 전부터 몇몇 가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최근에 ‘신촌블루스’ 이정선 씨가 우리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지요.”
LP판이 다시 유행하는 이유와 관련 이 대표는 “디지털 음악은 여성스럽고 아날로그는 남성적입니다. 파워가 있어요. 레코드판을 넣어서 듣는 거 하고 CD로 듣는 거 하고 소리가 다릅니다. CD는 여성적이고요. 저도 그렇지만 아마 나이든 분들은 아날로그가 좋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1960~1980년만 하더라도 LP판이 가요의 유일한 전달수단이었다. 톱 가수라할지라도 이 대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고분고분해야 했다. 노래를 아무리 잘 불러도 녹음 과정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그 판은 외면당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대표의 주 고객은 신중현·펄시스터스·송창식 등 가수들과 방송인 이종환·최동욱 씨 등이었다.

▲ 1965년 LP커팅을 하고있는 이 청 대표.

“많을 땐 하루 30곡을 녹음할 때도 있었어요. 가수들 얼굴 볼 시간도 없었지요. 신중현씨는 밤을 새우며 녹음하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기도 했지요. 클래식 음반작업도 많이 했는데 신상철·김동석 같은 정상급 바이올린 연주자들도 우리에게서 녹음했어요.”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인기가요 중 금지곡이 많았다. 작곡가 김민기씨가 취입한 LP판 ‘아침이슬’도 금지곡에 들었다. 안기부에서 이 곡을 녹음한 이 대표를 찾았다. 이 대표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더 부르지 않았고 별일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이 대표는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 스튜디오에 나와 커팅 작업을 한다.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커팅의 핵심 기술은 LP판 한 면에 노래가 몇 곡이 들어가든 보기 좋게 수록하는 겁니다. 가요의 경우 LP 한 면에 6곡이 들어가요. 그런데 4곡을 넣을 경우 빈공간이 남지요. 그런 게 생기지 않도록 잘 배열하는 게 중요해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이는 가수도 있다. 마이크에 입을 바싹 갖다 대고 저음으로 부르거나 옥타브가 높은 소프라노 가수의 경우다. 저음의 가수는 박일남이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그런 경우 툭툭 소리가 나 소리를 잡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LP판은 녹음-커팅-화학처리-마스터디스크 제작-대량생산의 과정을 거친다. 표면이 매끄러운 무음반판을 커팅 기계에 올려놓고 콘솔(음향조절장치)을 통해 전달되는 가수의 노래를 ‘커팅헤드’를 이용해 소리골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판을 ‘마스터디스크’라고 한다. 이를 화학처리 해 메탈(동)디스크를 만들어 프레스 기계에 넣고 대량으로 찍어낸다.
이 대표는 가요 음반뿐만 아니라 영어테이프, CD까지 제작해 우리나라 음향산업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특히 찬송가 전곡을 녹음한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국의 교회 성가대가 우리 스튜디오를 찾아와 600여곡의 찬송가를 나누어 녹음했어요. 한 성가대가 녹음을 하는 동안 200~400명의 다른 성가대는 밖에서 기다리는 식이었지요.”
이 대표에게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 묻자 “스튜디오 넓히고 수억원씩 하는 기자재 사느라 돈도 모으지 못했다”며 웃었다.
이 대표는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음향에 관심이 많아 ‘킹스타레코드’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동성영화사’에서 영화 더빙을 잠시 하다 독립해 현재의 자리(서울 마장동)에서 창업했다. 이곳에서만 45년째이다. 당시 녹음시설이 마땅치 않아 담요로 창문을 가리고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달러가 없어 필요한 기자재도 수입할 수 없었다. 미8군이 쓰다 버린 마이크, 녹음기 등을 청계천상가에서 구해다 수리해 쓰기도 했다.
이 대표는 “전기 사정도 100V였다가 60V로 다운되는 등 좋지 않아 밤 12시 넘어 심야 작업을 해야 했다”며 “50년 넘게 이 일을 해온 보람이라면 우리나라 음향산업 발전에 일조를 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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