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했을 때도 행복했을 때도 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불행했을 때도 행복했을 때도 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6.09 10:08
  • 호수 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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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50년, 시집‘살 흐르다’펴낸 시인 신달자

남편과 시어머니 병치레, 본인 암 극복… 마흔 넘어 공부해 대학교수 돼
시 쓰게 된 계기는 성공한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우연히 본‘외롭다’는 글

 

시인 신달자(71)씨는 지난 2월, 13번째 시집 ‘살 흐르다’(민음사)를 펴냈다. 등단 50년의 일이다. 시인 1500여명을 둔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그만 둘 무렵이기도 하다. 일흔 넘어 시집 낸 것에 의미를 두고 만나려고 했으나 시인은 다망하고 건강도 좋지 않다며 차일피일 미루었다. 회장직을 내려놓고 비로소 짬을 냈다. 5월 말, 병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신씨를 강남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단아하게 빗어 올린 머리, 주름을 찾아볼 수없는 맑은 얼굴, 차분한 음성이 영락없는 ‘여류시인’이었다.

-건강은 어떠신가.
“나이 들면 아프기 마련이지요. 조금씩 아픈 것과는 친구처럼 지내야 해요. 그걸 어디가 아프다고 환자의식을 가지지 말고 병원과 친해져야 해요.”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내가 (회장)하면서 시집을 2권 냈어요. 우리나라 음식을 가지고 76명의 시인이 시를 써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2013)이란 제목으로 나왔어요. 그걸 문학번역원(문화체육관광부 소속)에서 일어·중국어·영어로 모두 번역을 했어요. 다른 한 권은 역사적인 인물 100명에 대해 시인 100명이 쓴 시집입니다.”

-왜 음식인가.
“한식은 손끝의 음식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 함께 조리되는 음식이란 점을 알리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손수 캐내어 버무린 자연 그것이 한식이 아니겠어요. 한국 음식의 장점과 우수성, 시인들의 개인적 삶이 무르녹은 음식시는 사람들에게 감미로운 맛으로 전해지고 한국 음식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지요.”

신씨도 ‘선지해장국’이란 음식시를 썼다. 신씨는 ‘살 흐르다’에도 음식시를 서너 편 실었다. ‘북엇국’이란 시가 그 중의 하나다.
…뜨거운 맛을 봐야지 몸을 내던지고 맛을 내는/제 몸의 한철 겨울의 고문을 풀어 놓는 황태의 증언을/맞짱 뜨다가/ 견디거라 견디거라 견디거라/ 한겨울 덕장에서 납작 엎드려/ 뼈까지 오그라들어 순해진 법문들의 메아리/ 펄펄펄 뛰는 푸른 가스 불 위에서 시원하게 끓고 있다 /수행은 고되고 시원한 것 아니냐며…

-‘살 흐르다’는 어떤 시들인가.
“이 시집을 쓸 때 가족에 대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와 타인, 둘로 나누어집니다. 앞에는 아버지·어머니·딸들이 나오고 뒤에는 스타벅스, 동네 떡집, 요구르트 장수들이 등장해요. 그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지요.”

-그 중 노인에게 권하고 싶은 시라면.
“노인에게 뭘 읽으라고 금을 긋는 문학이 어디 있나요. ‘아리랑’은 유치원생도 부르고 노인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나이가 들면 시력도 떨어지고 시를 읽는 것조차 귀찮아집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에요. 말을 들어주고, 만져주고, 그런 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노인의 고독사 원인이기도 하지요.
“노인정에선 봉사자들이 기계적으로 대해요. 그런 것보다는 인간 냄새가 나는 말을 해줄 사람이 노인들에겐 필요해요. 반면에 건강한 노인들은 시를 읽는 것이 좋지요. 정서적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의 기둥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문학·미술·음악 등 예술은 어떤 면에서 자기를 이겨내는데 큰 힘을 줍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사유할 대상이 아니지요. 나한테만 오는 것이라면 깊이 연구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거잖아요. 다만 시간에 대한 사유는 합니다. 나한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 내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 어떤 걸 하고 어떻게 끝냈는가, 오늘에 대한 사유만 합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그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유독 가족에 관한 시가 많다.
“그렇지요.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시집도 있고 이번에는 딸들도 있어요.”

신씨에게 가족은 ‘고난’이자 축복이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 수발하다 2000년 떠나보냈다. ‘살 흐르다’ 에 ‘10주기(週忌)’란 시가 있다.
바람 서늘한 날 당신 내 무릎 베고 눈감았다/ 지금 그곳 환한가/ 흰 뼈가 마지막 빛으로 일어서고/이제야 소리 되지 않았던 속내를 수습하고 있다면 환하리 (중략) 일으킬 수 없는 당신 몸 위에서 내 마흔/옥죄이는 알몸을 허허롭게 비벼 보기도 했지만/당신 가고 난 생각보다 찬란하지 않았어 여보……
나쁜 운명은 혼자 오지 않는 법. 시어머니가 9년간 병치레를 했고 본인도 암에 걸려 한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신씨는 암 진단을 받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환자를 간호하는데 9단에 가까운 내가 딱 환자로 누우니까 간호했던 몇십년의 세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너무나 절박했다. 암 진단을 받고는 아, 남편도 이랬었구나, 또 우리 어머니도 이랬었구나, 죽는 건 이런 것, 병은 이런 것이구나, 이런 걸 체험했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하느님도 정말 이상하다. 간접적으로 보게 했으면 내가 경험하는 건 좀 면제해줘야지 이게 뭐야. 이렇게 대들기도 했다.”
3중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신씨는 마흔 넘어 대학원을 다녔고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됐다. 평택대·명지대 등에서 20여년 제자를 가르치다 숙명여대에서 정년퇴임했다. 보통사람이라면 포기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했을 테지만 신씨는 당당히 맞서 싸웠고 극복했다. 옛날 일을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시인에게 에둘러 물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은 사람 같지가 않다.
“고생을 흘리고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힘들게 살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집안에 환자가 있고 시어머니가 누워 있을 때도 외출할 때는 향수를 뿌렸어요. 그런 것들이 느껴질까 봐서요.”

-그 상황에서도 공부를 하다니 존경스럽다.
“그것도 가족 덕분이에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나를 굉장히 측은해 했어요. 남편이 그런 상태이니까 저거 어떡하나 걱정하신 거지요. 남편이 몸이 안 좋으니까 나라도 반듯하게 돼야 하지 않나, 그래서 택한 게 공부였어요. 어머니도 내가 공부하기를 원했어요. 어머니가 안 가진 것을 딸이 갖기를 바랐던 겁니다.”

-당시 고통을 세월호 유족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그분들이 더 하지요. 왜냐면 나는 눈으로 보면서 화를 내면서 살았지만 이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그 안에 못 들어가니까 그 비통함이야 비교가 되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건 혈육이에요. 혈육이란 건 가장 큰 기쁨도 주지만 가장 충격을 주고 가장 아픈 것이기도 해요. 연애하다 시련당하거나 나처럼 환자가 있어서 고생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경남 거창 출신의 신달자 씨는 숙명여대 국문과·동 대학원을 나왔다. 1964년 문학종합지 ‘여상’에서 여류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1972년 박목월 시인(1916~1978)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재등단했다. ‘아가’ ‘열애’ ‘아버지의 빛’ 등의 시집이 있다.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엄마와 딸’ 등 다수의 에세이집과 ‘물위를 걷는 여자’(1989) 등 소설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공초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201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시를 쓰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사업가로 돈이 많았고 성공한 분이었어요. 내가 중학교 때 육성회장을 지내셨지요. 그때 시골에서 육성회장을 한다면 잘 나가는 사람이었지요. 한번은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외롭다는 글을 봤어요. 왜 많이 가졌는데 외로울까, 그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어요. 인간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걸 들여다보는 게 문학이지요.”

-박목월 시인이 추천을 해주었다.
“대학 때 ‘문학의 밤’을 하면 박목월 선생님이 오셔서 평을 해주셨어요. 인자하시고 천상 시인이셨지요. 한 번은 내가 ‘나그네’가 대표작이지요? 하고 여쭈었더니 ‘내 대표작은 오늘밤에 쓸 것이다’고 대답하세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명구이지요. 자기 작품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앞으로 쓸 시에 대한 시인의 사명과 의지 같은 게 들어있어 잊혀 지지 않아요.”

-김남조 시인과도 각별한 사이다.
“제가 다닌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셨어요. 19살에 처음 뵙고 지금까지 어머니처럼 모시는 분입니다. 가톨릭에 귀의할 때 대모를 서주시기도 했지요. 처음엔 그분을 존경하고 좋아한 나머지 시도 닮으려 했어요. 후에 그건 선생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독창적으로 나가는 게 선생님의 제자가 되는 옳은 길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분이 한국 나이로 88세지만 야망이 있고 굉장한 것이 있어 오래 사실 것 같아요. 그런 분이 오래 살아야 합니다.”

-‘물위를 걷는 여자’, 제목이 좋다.
“처음 써본 소설이 히트를 했어요. 드라마, 영화로도 제작됐고요. 책은 200만부 정도 나갔어요. 그 제목은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겁니다. 여주인공이 워낙 강한 여자라 그렇게 지은 거예요.”

서울 강남구 광평로의 아파트에 사는 신달자 씨는 요즘 집 가까이 있는 딸 셋을 만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사위들은 대학, 법조계 등에 있다. 강연 요청이 오면 지방에도 내려간다. 최근 전주 교육청에서 학부형 200여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신자들이 읽을 책을 선정하는 위원장으로 있는 관계로 주로 영성적인 책을 읽는다.
신씨는 “한국시단의 특징이 60대 이상의 나이든 이가 열심히 한다는 점이다”며 “지난 세월 동안 불행했을 때도 행복했을 때도 시를 손에서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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