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베이비부머 퇴직자의 하루
어느 베이비부머 퇴직자의 하루
  • 신충몽 기자
  • 승인 2014.09.05 15:06
  • 호수 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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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 때문에 꽃이라고 불렀을까요, 꽃이라고 불렀기에 예쁜 것일까요? 예뻐도 너무 예쁜 꽃 그림을 친구가 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이 사진을 보내준 58년 개띠 내 친구는 얼마 전 평생 몸담았던 연구실에서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수재니 천재니,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살았지만 세월은 피해 갈 수가 없었나 봅니다.
물론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퇴직 후 얼마 동안은 연구실이 아닌 낮선 세상에 버려졌다는 좌절이 친구를 괴롭혔습니다. 아침이면 출근길에 나서고 싶고,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지식과 경험은 친구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친구의 이런 고통은 서서히 가정의 화목을 무너트리고 말았습니다. 친구는 우울해졌고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괴팍하게 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착한 아내의 배려로 서로 떨어져 지내기로 했을 뿐 이혼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끔씩 아내는 밑반찬도 챙겨주고 서로 강요하지 않는 조건으로 크고 작은 집안 행사에도 함께 갑니다.
지난 세월을 보상 받으려는지 친구의 일과표는 무척이나 살벌 했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거의 없는 듯한데 어느 날은 새벽 3시 반에 메일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메일을 보고는 혹시 친구가 외롭고 우울한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여행을 간다며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선물 사와라” 한 마디로 친구를 배웅했습니다.
친구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나서였습니다. 우리는 서울 코엑스 앞에서 만났습니다. 약속 장소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멀리서도 친구의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는데, 항상 넥타이에 정장차림으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친구가 흡사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꽃 거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평소 “왜 음식을 길거리에서 먹느냐”던 사람이 헝클어진 머리에 손에는 와플을 들고 먹고 있었기에 순간 제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성숙해진 친구의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친구가 가정까지 무너뜨리며 방황했던 것은 자신을 내려놓지 못해서였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될 텐데 어째서 나를 밀어낸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친구를 화나고 좌절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그 모든 것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 타국에 버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새털처럼 가볍고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호주의 어느 식당에서는 밥값대신 설거지를 해 주었는데 설거지를 잘 했다며 홀 서빙까지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며 웃었습니다. 5개 국어를 하는 친구이니 주인이 탐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친구가 돈이 없어서 그 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고 싶었다는데, 그 효과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58년 개띠 내 친구는 지금 하얗고 긴 털을 가진 우아한 ‘상근이’는 아니지만 우직하고 건강한 ‘복실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 착한 아내에게 여행담을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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