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육아’ 유감
‘노년 육아’ 유감
  •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 승인 2014.10.10 09:50
  • 호수 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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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황혼육아’ 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조부모의 육아가 늘고 있다. 낮 시간동안 아빠 엄마 역할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지칭하는 ‘할빠’ ‘할마’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경제력 있는 할빠, 할마를 잡기 위한 육아용품 업계의 움직임도 바빠지고 있다고 한다. 모 신문에는 2014년 1월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임신·출산 육아용품 전시회에 전시된 스마트 젖병이나 이유식 스푼 등 기능성 제품 구매 고객의 50% 이상이 조부모라는 기사도 보도되었다. 눈이 어둡거나 체력이 약한 50, 60대를 위한 육아용품도 많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또 얼마 전에는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손주를 본 사람의 인지능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전혜정 교수가 45~74세 여성 234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손주를 본 어르신의 치매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직접 만난 ‘젊은 할머니’들은 ‘황혼육아’나 ‘할빠, 할마’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처음에는 행여나 자식들에게 흉이 될까 말을 아끼던 할머니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불만을 털어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에서 애 보는 일, 감옥살이가 따로 없죠.”
“요즘 젊은 사람들, 지나칠 정도로 몸을 중요시 하지 않나요? 그런데 자기네 몸만 몸이고 우리 몸은 몸도 아닌 줄 아는지, 원.”
“할빠, 할마, 그런 건 돈 좀 있는 사람들 얘기죠. 아이고, 육아용품들도 어찌나 비싼지, 우리 같은 사람은 일일이 사줄 수도 없고, 주눅이 든다니까요.”
“누구누구 친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입 유모차 사줬다면서 꼭 한마디 하는 딸, 볼 때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죠. 딸이 아니라 원수 같다니까요.”
손자녀 봐주는 할머니들의 고민은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맞벌이 가정 510만 가구 중 절반(250만) 가구에서 조부모가 육아를 맡고 있다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2012년에 발표한 전국보육실태조사에서도 맞벌이 부부 중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50.5%, 워킹맘이 아닌 경우도 10.1%가 조부모와 함께 육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14년 5월에 서울시가 발표한 ‘통계로 본 서울가족의 모습’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 증가와 이혼 등의 영향으로 조부모와 손자녀가 함께 사는 ‘조손가족’이 2013년 현재 2만3344가구로서 1995년 3875가구에 비해 6배 늘어났다고 한다. 조부모와 함께 사는 15세 미만의 아동의 수도 1995년 3385명에서 2010년에는 9544명으로 2.8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13년 현재 자녀와 함께 사는 60세 이상 인구 중에서 39.7%는 ‘자녀의 독립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 6.8%는 ‘손자녀 양육과 자녀의 가사 지원을 위해서’라고 응답했다. 12세 이하 아동의 13.2%는 낮 시간에 조부모가 돌봐 주고 있ㅁ었다.
이상의 통계자료를 종합해 볼 때, 부모의 퇴근시간을 배려해주는 맞춤형 보육시설이 부족한데다가 아직도 남보다는 가족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보니 조부모, 특히 할머니에게 가해지는 자녀들의 압력이 거센 것이다. 한마디로 아동 보육의 ‘사각지대’를 할머니들이 메우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할머니들은 고달프다. 가장 힘든 건 역시 ‘몸’. 손주 돌보는 일 자체도 힘들지만 아이를 돌보는 동안 ‘살림’까지 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노동을 견뎌야 하고 결국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이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이 일주일에 9시간 이상 손자녀를 돌본 할머니들의 건강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심장병 발병률이 보통 할머니들보다 55% 높게 나왔다. 국내 한 병원에서도 허리 통증 환자의 25%가 육아 때문에 병을 얻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트레스, 식욕 저하, 불면증을 호소하는 할머니도 많다고 한다. 당연히 노년의 삶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뿐인가. 할머니들의 비공식적인 손주 돌봄 노동은 사회적으로도 저평가되고 있다. 이들이 제공하는 노동은 어느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숨어 있는’ 노동력일 뿐이다. 보육 관련 정부의 예산은 크게 늘고 있지만 손자녀를 양육하는 할머니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이래저래 ‘황혼육아’는 노년에 찾아오는 또 하나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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